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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끝없는 여정"-38

옥례의 통곡은 그 동안 온몸으로 공들여왔던 모든 꿈들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비탄의 소리였고, 길고 긴 장정(長程)에 종말을 고하는 절규였다. 그러나 그 통곡은 아무런 감동도 남기지 못한 채, 하늘 먼 허공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옥례의 전성기는 이렇게 막이 닫히며 세상 저편 뒤안길로 흘러가고 있었다. 김삼천 대방이 없는 함흥상단에 옥례의 존재란 있을 수 없었다. 그저 상권 밖으로 내쳐져, ‘한때의 여류상인 장옥례’의 희미한 허상으로 기억되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던 대방어른도, 갇혀있던 둥우리를 깨고 탈출하겠다는 여인의 거센 몸부림도 모두 사라져버린 지금,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곤 겹겹이 상처로 찢겨진 빈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여태껏 쌓아왔던 모든 성취를 포기하고 원점으로 ..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37

뿌옇게 밝아오는 새벽빛은 밤사이 벌어졌던 난장(亂場)의 흔적 때문인지 안개가 낀 듯 회색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런 햇살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뜻밖에도 옥례였다. 그녀는 쓸어질 듯 허우적거리며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다. 어깨 부위의 심한 통증을 참으며 어렵게 발길을 내딛던 옥례는, 앞에서 다가오는 복돌을 발견하자 버텨오던 강단(剛斷)이 온몸에서 빠져나가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만다. 황급히 달려간 복돌은 조심스럽게 옥례를 부축하여 일으켜보지만, 탈진한 그녀는 허물어지듯 복돌의 가슴으로 쓰러진다. 그녀의 몸을 받아 안은 복돌은, 땀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을 소매로 닦아주며 걱정스럽게 말문을 연다. “상처가 심한데, 약방에서 쉬지 않고 어쩌려고 무리를 한 것이야? 넌 중환자야! 지금은 움직여선 안..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36

새벽녘 동이 트기 직전의 원광(遠光)이, 김삼천 대방을 향해 내닫고 있는 복돌의 발길에 희미하게나마 어둠을 헤쳐주고 있었다. 옥례를 업고 약방을 향해 뛸 때는 그야말로 깜깜절벽 같은 칠흑 속을 어찌 그리 가르며 힘차게 뛰었던가 싶어 신기한 생각이 든다. 별관의 바깥 대문을 들어서던 복돌은 갑자기 엄습해오는 알 수 없는 기운에 황급히 몸을 움츠린다. 안채 앞마당에는 여러 명의 상단 식구들이 모여 있었고, 그 앞에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가쁘게 몰아 대는 사람이 서있었다. 아직 해가 뜬 건 아니지만 새벽 여명이 어스름하게 그들의 윤곽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앞에 서있는 이는 바로 최영섭(崔英燮) 도방(都房)이었다. 그는 함흥상단의 2인자로써 대방을 대신하여 상단 조직과 조직원들을 총괄하는 인물이다. 최 도방..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35회

오랜만에 만난 옥례와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한 채 자신의 숙소로 돌아온 복돌(福乭)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옥례의 차가운 환상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던 복돌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 앞 개울가로 나선다. 그리고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마음을 달래느라 안간힘을 써본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가엾고 실망스러웠던지 긴 한숨만 터져나올 뿐 마음은 가라앉지 않는다. 옥례가 들어있는 안채가 바로 지척인데, 어쩌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 멀기만 한 것인지 그저 서글픈 생각을 뿌리칠 수가 없다. 오늘 따라 천지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에 쌓여있어, 달도 별도 그 무엇도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졸졸거리며 힘없이 흐르는 개울소리만..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34

그들 무리들 중 두령으로 보이는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더니 몇 가지 확인을 한다. “김삼천이 오늘 저녁에 회령에 도착하는 것은 틀림없겠지?” “예! 틀림없습니다. 함흥상단 최영섭 도방에게 들은 예기니 확실할 겁니다. 믿어도 됩니다.” “물론 경성 행수 장옥례(張玉禮)도 함께 오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아마도~~ 지금쯤~, 장옥례는 회령에 들어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됐어. 회령에는 장사꾼들로 미어터질 것이야. 객지사람들로 뒤섞여 있으니 우리들 신분이 드러날 리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한 밤중에 은밀하게 처리할 것이니 전혀 표가 나지 않을 것이야. 도호부에서도 일일이 신경쓰기 어려울 것이고––. 이틈에 지시한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워야 한다. 일단 일이 끝나면 모두 회령을 떠나..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33

(제4부) 석양(夕陽) 뒤에 오는 것 태양은 언제나 중천에 머물며 세상에 밝은 빛발만을 내려주는 건 아닌 것 같다. 함흥상단(咸興商團) 김삼천(金三千) 대방의 머리 위를 찬란하게 비춰주던 서광(曙光)은 이제 그 광도(光度)가 빠르게 줄어들면서 석양을 향해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압록강 연안 의주만(義州灣)의 중국무역(中國貿易)과 두만강 연안 회령(會寧)의 여진무역(女眞貿易)을 석권하여 조선 제일의 무역상(貿易商)으로 당당히 올라서겠다는 그의 야무진 꿈은 이렇게 무너지고 마는 것인가? 요즘, 김삼천 대방은 깊은 시름과 함께 극심한 초조감에 사로잡혀 있다. 지금까지 조선 북부지방의 상권을 쥐락펴락하며 장세(場勢)를 휘어잡던 함흥상단 주변에 터무니없는 흉사(凶事)가 빈번하게 발생할 뿐 아니라, 쥐 죽은 ..

(제12화) 신분을 초월한 사랑

세종 때 경북 청송에 살고 있는 가이라는 여인의 이야기. 신분의 차이가 어찌 사랑을 막을 수 있겠는가! 사랑은 흐르는 물과 같기도 하고 바람 같기도 해서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산인 것을~~~. 가이(加伊)는 양반 신분의 여인이고 부금(夫金)은 가이 집에서 일하는 사노(私奴)다. 어릴 때 부모를 잃은 가이는 부금에게 모든 걸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러다 서로 사랑하게 되고 결혼까지 하게 된다. 신분의 벽을 뚫고 결혼한 두 사람의 사랑은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한다. '우리 사랑만 진실하면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하는 순진한 가이의 생각은 이내 무색해지고 만다. 그리고 곧 관아에 고발된다. "우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것도 죄 란 말입니까?” 가이는 청송 관아에 끌려가자 울면서 항변했다. "닥쳐라! ..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32

복돌은 밀려오는 절망감에 온몸을 떨며 오열한다.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옥례가 한없이 야속했지만, 그보다는 불꽃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옥례의 신세가 가련하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눈에 환하게 비치던 옥례의 밝은 형색(形色)이 점차 어두운 잿빛으로 변해가는 것이 더더욱 가슴을 아프게 했다. 물론 옥례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무단(無斷)의 행로는 복돌도 이미 예감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다만 엇나가고 있는 옥례의 행보를 막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고, 이런 세상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자신의 앞날이 어찌될 거라는걸 알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인생 행로라는 건 언제나 때늦은 후회와 안타까움으로 점철되어 있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에게 다가올 앞날을 ..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31

“오늘 밤은 너와 함께 지내고 싶은데 괜찮겠느냐?” 술잔이 몇 순배 오고 가자 대방어른이 그윽하면서도 물기 머금은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40대 초반의 김삼천 대방은, ‘네 삶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내가 질 것이니 네 인생 전부를 아낌없이 내게 맡기거라’ 라고 다짐하는 듯 은근한 미소로 옥례를 바라본다. 물론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를 자신의 여인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상단운영의 중심에 세워,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상권(商圈)의 권세가(權勢家)들을 능란하게 요리해 줄 자신의 분신(分身)으로 키울 생각이었다. 그러자면 그녀의 미모는 그들 권세가들을 휘어잡는 치명적 수단으로 활용될 것이고, 그녀의 농염(濃艶)한 몸매는 자연스레 권세가들의 몫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30

치도곤(治盜棍)이라도 안기려고 단단히 벼루다가 의외로 함흥상단의 선행을 알게 된 부사 영감이, 미안한 마음으로 베푼 저녁식사를 푸근하게 대접받은 김삼천 대방과 옥례는, 늦은 시각에 동헌을 나와 옥례의 숙소가 있는 주을온천(朱乙溫泉)을 향해 출발할 수 있었다. ‘영세어민 어로지원(漁撈支援)’에 대한 옥례의 설명에 감명을 받은 부사 영감이, 함흥상단에 거듭 찬사를 늘어놓자 한껏 고무된 대방어른은, 깔끔한 일 처리와 감동을 일으키는 말솜씨 등 열정적으로 난관을 풀어나가는 옥례의 원숙한 대인(對人) 솜씨에 큰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고, 자신의 수하(手下)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녀가 더없이 자랑스러웠다. 그런 탓인지 큰 키에 풍만한 몸매의 그녀가 오늘따라 더욱 농염하게 느껴졌고,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체취는 왠지 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