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동이 트기 직전의 원광(遠光)이, 김삼천 대방을 향해 내닫고 있는 복돌의 발길에 희미하게나마 어둠을 헤쳐주고 있었다. 옥례를 업고 약방을 향해 뛸 때는 그야말로 깜깜절벽 같은 칠흑 속을 어찌 그리 가르며 힘차게 뛰었던가 싶어 신기한 생각이 든다.
별관의 바깥 대문을 들어서던 복돌은 갑자기 엄습해오는 알 수 없는 기운에 황급히 몸을 움츠린다. 안채 앞마당에는 여러 명의 상단 식구들이 모여 있었고, 그 앞에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가쁘게 몰아 대는 사람이 서있었다. 아직 해가 뜬 건 아니지만 새벽 여명이 어스름하게 그들의 윤곽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앞에 서있는 이는 바로 최영섭(崔英燮) 도방(都房)이었다.
그는 함흥상단의 2인자로써 대방을 대신하여 상단 조직과 조직원들을 총괄하는 인물이다. 최 도방의 말투는 평소와 달리 매우 강압적이고 날카로워 흡사 쇳소리를 내는 것 같아 어쩐지 생소한 느낌이 든다. 복돌은 그 자리에 끼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마당 입구 창고 옆 후미진 곳으로 몸을 감추고 도방의 말을 주시한다.
“느닷없이 닥쳐온 횡액(橫厄)인지라 무어라 말문을 열어야 할지 그저 황당하고 막막할 뿐이다만∙∙∙∙, 오늘 새벽 대방어른께서 갑작스러운 변고를 당하시어 그만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어제까지 쩌렁쩌렁 하시던 분이 이처럼 갑작스러운 일을 당하시다니∙∙∙∙, 그저 어안이 벙벙하여 이 사실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참으로 비통하고 슬픈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상단 식구들 모두의 마음이 다 억장이 무너지는 심경일 것이다––.”
최 도방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고, 상단 식구들 또한 울음을 삼키며 오열한다.
잠시 후 마음이 진정되자 도방의 말은 계속된다.
“이번 참화는 전적으로 요망한 계집 장옥례 때문에 벌어진 일임이 분명하다. 그년이 갖은 요사(妖邪)를 떨며 대방어른의 총기를 흐려놓더니만 끝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고 만 것이다. 대방어른께서 그년을 가까이하시지 않았더라면 이런 참사는 애당초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요사이 계집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지시는 대방어른의 모습을 보면서, 말도 못하고 속만 끓여왔는데, 정작 이 지경을 당하고 보니 말리지 못한 것이 뼈아픈 후회로 남아 견딜 수가 없구나. 계집 주제에 본데없이 상단 일에 끼어들어 미주알고주알 참견하며 입방아를 찧어댔으니 하늘인들 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허! 대방이 죽었다고? 그럼~~, 옥례는? 도대체 옥례는 어쩌면 좋단 말인가! 더구나 대방이 죽은 이유가 옥례 때문이라니! 이런 기가 막힐 노릇이 어디 또 있단 말인가!’
도방의 말을 듣는 순간 복돌의 가슴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갑자기 숨이 막힌다.
한밤중에 집안으로 침입하여 대방을 살해한 자객들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이, 엉뚱하게 옥례에게 사태의 책임을 씌우고 있다니––, 마당에 모여 있는 상단 식구들 조차도 모두 어이가 없었던지 시선을 돌리고 만다. 무엇보다 자객들을 추궁하여 사고의 전말을 규명하는 게 급선무일 텐데, 붙잡은 자객들은 모두 빠져나가도록 길을 터주고는 장옥례 행수 타령을 하는 걸 보면 이번 사건과 도방 간에 무언가 숨겨진 구석이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복돌 역시 도방의 언사에 바짝 긴장하며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하고는 이를 어찌 풀어나가야 할지 곱씹으며 이를 앙다문다.
최영섭 도방은 강압적인 몸짓을 하며 말을 계속한다.
“대방어른의 영구(靈柩)는 함흥 본가로 모시게 될 것이다. 오늘 사고에 대해서는 절대 외부에 알려서는 안 된다. 모두들 이를 명심해야 한다. 알겠느냐?”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상단 식구들은 새 주인 격인 도방의 말에 순종하며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지금부터 모든 상단 일은 도방(都房)인 내가 이끌어 나갈 것이다. 너희들은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된다. 오늘부터 벌어질 여진족과의 무역거래도 계획된 대로 진행할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모든 것을 잊고 무역거래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최 도방은 어금니를 질끈 씹으며 여러 사람들에게 자신의 위세를 과시라도 하려는 듯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혹시~~, 장옥례의 행방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느냐?”
도방의 말에 국경무역을 담당하고 있는 김철기 행수가 앞으로 나선다.
“갑산(甲山)의 약제상인 복돌(福乭) 청년이 장행수(張行首)를 들쳐 업고 어디론가 뛰쳐나가는 것을 여러 사람이 보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자상(刺傷)을 입은 장행수를 구하기 위해 가까운 약방으로 뛰어간 게 틀림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인근 약방들을 뒤져보면 장옥례의 생사는 쉽게 알아볼 수 있겠구나! 해가 뜨는 대로 김철기 행수가 책임지고 인근 약방들을 수소문해서 그년의 생사를 반드시 파악해야 한다. 물론 살아있으면 반드시 잡아와야 할 것이다.”
‘하––, 이러다간 옥례의 목숨이 위태롭겠구나!’
위기를 느낀 복돌은 창고 옆에 메어 논 자신의 달구지를 끌고 서둘러 별관을 빠져나와 옥례가 있는 강씨 약방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그때 복돌의 뇌리를 스치는 괴이한 광경이 떠올랐다.
그가 잠을 이룰 수 없어 숙소 앞 개울가로 나왔을 때 일어난 긴박한 순간의 한 토막이었다. 별관 담장을 넘어온 검은 괴한들이 안채를 향해 마당으로 잠입해 들어갈 때, 담장 앞에 서서 안채 쪽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무언가 분부를 내리던 한 사내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그는 다른 괴한들과는 다르게 남색(藍色)의 평상복을 입고 있었고, 무언가 무리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의 외양을 풍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 도방이 입고 있는 남색 의복이 그와 유사할 뿐 아니라 키와 몸체 등 풍채가 여간 흡사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최영섭 도방이 대방을 해치고 함흥상단을 가로채기 위해 배반을 했단 말인가?’
머리를 갸우뚱해보지만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보았던 사실을 가지고는 이렇다저렇다 확정 지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 웬 사람이지?
한참을 달구지를 끌며 달려가는 복돌 앞에 허우적대며 누군가 걸어오고 있는 사람의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38 (0) | 2021.03.01 |
---|---|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37 (0) | 2021.02.22 |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35회 (0) | 2021.02.08 |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34 (0) | 2021.02.01 |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33 (0) | 2021.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