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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사랑의 요소(要素)」-23

백성을 버린 임금−4  임금 일행이 첫 기착지인 동파역(東坡驛)에 도착한 것은 한밤중이 한참 지나서였다. 임금과 비빈은 물론 호종 하는 신료들과 호위군사들은 빗속을 뚫고 강행을 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데다 온종일 굶었으니 몰골이 후줄근하고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임금과 신료들이 역관으로 각각 들어가 한숨을 내쉬며 잠시 쉬고 있는 동안, 호위병사들도 비를 피해 동원 앞 행각으로 몰려가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음식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다들 허기에 주린 배를 움켜지고 있던 터라 맛있는 밥 냄새가 풍기니 눈들이 휘둥그래질 수밖에 없었고, 코를 벌름거리며 음식을 찾다가 행각 옆 작은 방에 차려진 음식을 발견하고는 우르르 몰려들었다.“아니, 이게 웬 떡이여--! 어서 먹고 보세. 굶어 죽는 줄 알았어.”“어제부..

역사소설「사랑의 요소(要素)」- 22

백성을 버린 임금−3 사현을 넘어 홍제원(弘濟院)에 다다르니 날이 새는지 동녘이 희뿌옇게 밝아온다. 경기감사 권징(權徵)이 쫓아와 임금 뒤에서 우산을 받치고 따라 나선다. 이제는 날이 밝아 일행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임금을 비롯하여 대신들은 모두 물에 빠진 생쥐 모양이 되었고, 뒤에서 따라오는 궁녀들도 비에 젖은 치마 저고리가 몸에 착 달라붙어 마치 나신처럼 맨몸이 드러났다. 정황 중에도 젊은 승지들은 그 모습을 놓칠 세라 정신없이 눈동자를 번뜩였다. 궁녀들이 치마를 걷어 올리고 따라갈 때 흰 속살이 유난히 눈길을 끌기도 했다. 비는 여전히 쏟아졌고 작은 개울도 물이 불어 모두 큰 내를 이루었다.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길라잡이는 얕은 곳을 찾느라 어지간히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어느덧 벽제관(碧蹄館)..

역사소설 연재 2023.12.25

역사소설「사랑의 요소(要素)」- 21

백성을 버린 임금−2 선조(宣祖)가 임금에 오른 것은 전혀 예견치 못한 일이었다. 후궁들의 치마폭 속에서 쾌락을 쫓으며 유유도일 했던 선대 임금 중종(中宗). 그의 일곱 번째 서자로 태어난 이가 덕흥군이고, 선조는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다. 정비(正妃)의 장남이 다음 임금을 이어받는 조선임금의 적장자(嫡長子) 승계원칙으로 보면 선조는 왕위 계승 순위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선대 임금이 적장자없이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정파의 필요에 의해 16세의 어린 나이로 갑자기 임금에 오를 수 있었다. 제왕이 되기 위해 호되게 거처야 할 수련과정을 전혀 거치지 못하고 임금이 된 그는, 조선 왕계(王系)의 정통성도 부적격이었고 덕목도 갖추지 못해 자격 없는 임금임이 분명했다. 그는 자신이 진정 임금이 된 ..

역사소설 연재 2023.12.18

역사소설「사랑의 요소(要素)」- 20

(제4부) 백성을 버린 임금−1 임금은 신립(申砬) 장군을 조선 최고의 맹장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조정 신료들은 물론 백성들 사이에서도 조선 영토를 굳건히 지켜낼 장수는 오로지 신립 장군뿐이라고 확신했고,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그러나 패장 신립이 탄금대 물속에 몸을 던져 자결하면서 충주 방어선이 뚫린 것은 온 나라의 믿음과 기대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큰 충격이었다. 충주의 패보는 한양으로 향하는 왜군의 공격이 막힘없는 탄탄대로에 올라섰음을 의미하였으며, 동시에 조선의 국운이 풍전등화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임금과 조정 대신들에게 왜란을 막아낼 수 있는 방책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정에서는 황급히 회의를 열어 대책을 강구하기에 바빴지만, 실은 대책을 강구하기보다는 어디로 피신..

역사소설 연재 2023.12.11

역사소설「사랑의 요소(要素)」- 19

(제3부) 악연인가, 가연인가−5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소식을 들은 김 진사 댁 마님은 서연의 처지를 그저 몰라라 할 수만은 없는 입장인지라 갑진을 불러 아이를 어찌 돌봐야 할지 여러모로 의논을 하였다. “순금이가 그 지경이 됐다니 어쩌면 좋으냐? 그 아인 왜 그리 박복한 것이냐? 참으로 딱한 일이야! 쯔쯔쯔~~! 결국 서연 어린 것이 지 어미 없이 홀로 살아야 하는데, 어찌 했으면 좋겠는지 네 생각을 예기해 보거라. 그냥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일 아니더냐?” “글쎄요! 저도 아주 답답하기만 하네요. 이를 형에게 알릴 수도 없고--. 어떻게 하던 어린 것은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 않겠어요?” “네 형에게 알릴 생각은 아예 하지 말도록 해라. 공연한 풍파를 일으킬 필요는 없느니라!” 갑수 ..

역사소설 연재 2023.12.04

역사소설「사랑의 요소(要素)」- 18

아침이 밝아오자 부엌을 뒤져 서연에게 대충 아침을 먹인 다카하시는 조금 경계를 늘어트린 아이에게 “내 이름은 다카하시라고 해, 다카하시~. 알겠니?” “∙∙∙∙∙∙, 다카하시~?” “그래! 맞아. 다카하시가 내 이름이야. 잘 기억해 둬, 알았지?” 서연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네 이름이 뭔지도 오빠에게 알려주겠니?” 오빠란 말에 서연은 힐끗 다카하시를 쳐다보더니 모기만 한 소리로 대답한다. “∙∙∙∙∙∙서연이요--.” “~서연? 아주 예쁜 이름이구나! 음--. 서연아, 내 말 잘 들어! 네 어머니는 내가 꼭 찾아서 네 앞에 데려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꼭 약속할 게, 알겠지? 그리고 오빠가 가끔씩 너를 보러 올 거야. 그때까진 아랫마을에서 지내는 게 좋겠어, 내가 데려다 줄 테니~.” 서..

역사소설 연재 2023.11.27

역사소설「사랑의 요소(要素)」- 17

(제3부) 악연인가, 가연인가−3 문밖에서 시신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한 병사가 방안으로 들어와서 우두머리에게 무어라 보고를 한다. 아마도 여인을 어떻게 처리할 지를 묻는 것 같았다. 순금의 생사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우두머리는 앉은 채 한참을 궁리에 빠져 있더니 돌연 정색을 하며 병사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린다. “시신을 숲 속 뒤편에 묻도록 하라. 이 여인은 본부로 연행한다.” “네! 잘 알겠습니다.” 병사는 부동자세를 취한 후 큰 소리로 대답한다. 겁에 질려 어미 품에 달라붙어 있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우두머리는 ‘획’ 하고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가버리고, 곧이어 병사들이 여인과 아이를 무자비하게 떼어 놓고는 아이를 외면한 채 여인을 끌고 나간다. 아이를 남겨야 하는 어미의 비통함..

역사소설 연재 2023.11.20

역사소설「사랑의 요소(要素)」- 16

(제3부) 악연인가, 가연인가−2 순금의 저항은 점차 힘이 빠져가고, 야욕을 채우려는 사내의 막바지 몸부림이 절정을 이루려는 순간이었다. 맨 살만 남은 저항의 막바지에, 체념에 빠진 순금은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 닿았음을 느낀다. 순간 갑수와 갑진을 동시에 떠올린다. ∙∙∙∙∙우리 딸 서연을 어이할꼬! 도련님께서 우리 딸을 지켜 주시기나 할는지? 아가야, 어쩌면 좋단 말이냐?∙∙∙∙∙ 어차피 나 자신은 버려질 수밖에 없겠구나 각오하며 몸이 찢기는 것을 체념했지만 우리 딸만은 어떻게 든 지켜야 할 텐데 하는 모정이 솟구쳤다. 허나 아무런 묘책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였다. 마침내 내 몸이 왜놈에게 더럽혀지는구나 하는 그 순간, 야수와 같았던 남자의 무거운 몸이 ‘퍽’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여인의 몸 위로..

역사소설 연재 2023.11.13

역사소설「사랑의 요소(要素)」-15

임진년 4월 그믐날 새벽. 들판에는 우레비가 요란하게 몰아쳐 세상의 모든 아비귀환을 한꺼번에 뿜어내기라도 하듯 소란스러운 새벽녘이다. 불어난 달래강의 물소리가 빗소리에 더해져 하늘이 내려앉는 것처럼 먹먹한 울림이 천지를 억누른다. 먹구름에 휩싸인 사방은 그저 칠흑같이 깜깜하여 소리도 빛도 모두 방안에 갇혀버린 듯 음습하기만 하다. “탕탕탕, 탕탕탕, 탕탕탕, ∙∙∙.” 빗소리에 묻혀 어디선가 희미하게 콩 볶는 소리가 잠결에 들려온다. “∙∙∙∙∙? 무슨 소린가~!” 순금네는 꿈결인지 잠결인지 정신이 가물가물하다. 다시 잠에 빠져드는 순간 자박자박하는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온다. 분명 진창길을 걷는 발자국 소리가 틀림없다. “∙∙∙∙∙∙? 이게 뭔 소린가? 이 새벽에 웬 발자국 소리람~.” 젊은 과수댁은 잠..

역사소설 연재 2023.11.06

역사소설「사랑의 요소(要素)」- 14

(제2부) 출생의 비밀−9 옛집으로 되돌아온 후 한동안은 엄니의 흔적과 체취를 찾아 꿈속을 헤매며 엄니의 환영과 함께 지내야 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먹먹하고 뭉글뭉글한 나날을 넋을 놓고 지내다 보니 그것이 지독한 몸살로 이어졌고, 심한 오한과 토악질을 견뎌야 했다. 문득 토악질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정신을 가다듬어 이리저리 손가락 셈을 하다 보니 아니나다를까, 순금의 몸에 이상한 징후가 나타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퍼뜩 뒤돌아보니 어쩐 일인지 순금의 몸에 있어야 할 달거리가 두어 달 째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태기가 있는 것인가? 무심히 지내다 이를 알아차리게 된 순금은 순간 숨이 멎는 듯 온몸이 경직되고 말았다. 망설임 끝에 순금은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고 아랫마을 명이 할멈을 찾아가기로..

역사소설 연재 2023.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