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연재

역사소설「사랑의 요소(要素)」-15

추동 2023. 11. 6. 10:14

 

 

임진년 4월 그믐날 새벽.

들판에는 우레비가 요란하게 몰아쳐 세상의 모든 아비귀환을 한꺼번에 뿜어내기라도 하듯 소란스러운 새벽녘이다. 불어난 달래강의 물소리가 빗소리에 더해져 하늘이 내려앉는 것처럼 먹먹한 울림이 천지를 억누른다. 먹구름에 휩싸인 사방은 그저 칠흑같이 깜깜하여 소리도 빛도 모두 방안에 갇혀버린 듯 음습하기만 하다.

“탕탕탕, 탕탕탕, 탕탕탕, ∙∙∙.”

빗소리에 묻혀 어디선가 희미하게 콩 볶는 소리가 잠결에 들려온다.

∙∙∙∙∙? 무슨 소린가~!”

순금네는 꿈결인지 잠결인지 정신이 가물가물하다. 다시 잠에 빠져드는 순간 자박자박하는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온다. 분명 진창길을 걷는 발자국 소리가 틀림없다.

∙∙∙∙∙∙? 이게 뭔 소린가? 이 새벽에 웬 발자국 소리람~.”

젊은 과수댁은 잠결에 뒤척이다가 요상한 소리에 놀라 부스스 일어나 등잔에 불을 붙이고는 문밖에 귀를 기울인다. 옆에는 딸내미 서연이 색색거리며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 있다. 연신 하품을 해대며 밖의 인적에 어렴풋이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철벅거리며 진창 바닥을 걷는 소리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쿵~, ~, 덜커덩.’

급하게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 오더니 갑자기 방문 앞 툇마루 위로 냉큼 올라서서 거칠게 방문을 열어젖힌다.

“아악! 누구요, 웬 사람이요?”

깜짝 놀란 순금네가 잔뜩 겁에 질려 소리친다. 그러나 고함소리는 목구멍에 걸려 가쁜 숨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군복 차림의 웬 낯선 사내가 총을 겨눈 채 여인을 노려보며 서있었다.

“어--? 아니--!”

소문으로만 듣던 왜병이었다. 인상이 험악하지는 않지만 충혈된 눈초리에 살기가 가득해 섬찟한 느낌이 드는 중년의 왜병이었다.

“쉿―! 입을 다물라. 죽기 싫으면 소리내지 말라.”

검지 손가락을 펴서 입에 대며 조용히 하란다. 그러더니 자신의 배와 입을 번갈아 가리키면서

“먹을 것 좀 달라! 배가 고프다. 밥 좀 있나?”

사색이 되어 기함하기 직전인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밥을 가져오겠다는 시늉을 하고는,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몇 번이고 왜병을 훔쳐보며 부엌으로 향한다. 왜병은 총을 번쩍 들며 딴짓을 말라는 듯 여인을 위협한다. 밥상을 차리는 동안 왜병은 부엌문을 열어놓고 여인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밥상이 방안에 놓이자 여러 날 굶주렸던지 정신없이 밥을 퍼먹는다. 밥 한 그릇을 단숨에 먹어 치우더니 고맙다는 듯 묘한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본다.

 

왜병은 옆에 자고 있는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천장을 한참이나 응시한다. 아마도 고향에 두고 온 자녀를 떠올리는 모양이다. 그러더니 식곤증이 드는지 연거푸 하품을 해댄다. 왜병은 돌연 눈동자가 게슴츠레 해지며 야릇한 눈으로 여인의 몸을 훑어보기 시작했고, 어느덧 불룩한 가슴 언저리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저고리 위로 팔을 두르며 부풀어 있는 앞가슴을 감싸 앉았고, 사내의 눈길이 몸에 닿을 때마다 흠칫 흠칫 놀라 몸을 틀며 움츠린다. 그게 자극이 되었던지 그녀의 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사내는 금세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돌변하며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순식간에 여인의 몸을 덮친 사내는 무슨 말인지 일본말로 위협을 가하며 맹렬하게 그녀의 몸을 헤집는다. 야욕을 채우려는 왜병과 몸을 지키려는 여인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옆에 있던 밥상이 발채에 채어 잠을 자고 있는 서연 위로 엎어진다. 놀라서 잠을 깬 서연은 웬 아저씨 밑에서 바동대는 엄니를 보고는 겁에 질린 나머지 울음을 터트린다. 성열(性熱)에 빠져 제정신이 아닌 사내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더더욱 여인의 몸을 파고들며 욕망을 채우려 발버둥을 친다.

~, 여인이여! 여인의 운명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