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악연인가, 가연인가−3
문밖에서 시신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한 병사가 방안으로 들어와서 우두머리에게 무어라 보고를 한다. 아마도 여인을 어떻게 처리할 지를 묻는 것 같았다. 순금의 생사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우두머리는 앉은 채 한참을 궁리에 빠져 있더니 돌연 정색을 하며 병사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린다.
“시신을 숲 속 뒤편에 묻도록 하라. 이 여인은 본부로 연행한다.”
“네! 잘 알겠습니다.”
병사는 부동자세를 취한 후 큰 소리로 대답한다.
겁에 질려 어미 품에 달라붙어 있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우두머리는 ‘획’ 하고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가버리고, 곧이어 병사들이 여인과 아이를 무자비하게 떼어 놓고는 아이를 외면한 채 여인을 끌고 나간다. 아이를 남겨야 하는 어미의 비통함과 어미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의 절박함이 애를 끊는 듯 숨이 넘어가는 듯 길게 길게 하늘을 찢어 놓는다. 언제 다시 만날 지 모르는 두 모녀의 길고 긴 이별이 시작된 것이다. 왜병들은 삽시간에 집에서 멀어지며 희미한 발자국 소리마저 먹 색의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 듯 사라져버린다. 다만 엄니를 찾는 아이의 애절한 울음소리만이 사방을 흔들며 여명을 깨우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서연은 천애고아가 되어 험난한 생의 시발점에 서게 된다. 나이는 열한 살이었다.
스르르 뒷문이 열리며 소년 왜병 다카하시가 방안으로 들어온다. 잠시 마을 뒤쪽 견문산 풀숲에 숨어 있다가 다른 왜병들이 사라지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는 절망과 두려움에 쌓여 몸을 떨고 있는 아이에게로 다가간다. 아이는 더욱 몸을 움츠리며 벽 쪽으로 앉은걸음을 친다.
“꼬맹이! 겁먹지 말아라~. 나는 일본 사람이지만 나쁜 사람이 아니야. 네 어머니는 곧 돌아오실 거야, 그때까지 내가 너를 도울 테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마~. 나는 네 편이야― 알겠지?”
서연은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입을 다문 채 다카하시를 응시한다.
서연의 나이쯤 됐을 때이던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가출한 다카하시는 갖은 고생 끝에 사쓰마 번(薩摩藩)의 사무라이(무사)에게 발탁되었고, 곧 번 내의 훈련도장에서 소년무사가 되기 위한 무술연마에 전념할 수 있었다. 훈련과정은 생사를 걸어야 하는 지옥훈련으로 유명했고, 그 와중에 고향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큐슈(九州)의 서남쪽 작은 섬 아마쿠사(天草)의 고향 땅에는 홀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살고 있었지만, 집 떠난 후 육칠 년이 지나도록 가보기는커녕 소식 한번 전해볼 기회가 없었다. 어머니는 독실한 천주 교인이었는데, 당시 종교탄압이 극심했기 때문에 지금쯤은 어머니도 누이도 모두 이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카하시는 이 집 모녀를 보면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고향의 어머니와 여동생의 모습이 떠오르며 눈앞에서 겹쳐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특히 가여운 누이와 처지가 닮은 여자 아이를 바라보면서 마치 누이동생이 환생하여 앞에 앉아 있기라도 한 듯 착각에 빠지며, 누이를 향해 벅차게 끌어오르는 뜨거운 연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는 만나기 어려운 누이동생을 대신하여 서연을 작은 여동생으로 가슴에 품는다. 이것이 평생의 인연이 될 줄이야!
사실 다카하시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무서운 무사였다. 그는 큐슈의 남부를 장악하고 있는 사쓰마 번 다이묘(大名-영주)인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말단 무인으로 입적하여 첩보활동, 파괴활동, 침투전술, 암살 등 특수작전을 집중적으로 훈련한 결과 가장 잔인한 무인이라 할 수 있는 닌자(忍者-정찰 및 첩보요원)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화약을 다루는 솜씨가 비상하여 적진의 파괴나 암살 작전을 전개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원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 센고쿠 시대(戦国時代)를 통일하면서 시마즈는 도요토미의 핵심 장수로 발탁되었다. 대륙으로 진출하겠다는 야욕에 사로잡힌 도요토미는 중국을 토벌하기로 결심하고, 우선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시마즈를 따라 임진왜란에 참전하게 된 다카하시는 첩보, 절도, 암살, 파괴, 후방 교란 등의 각종 궂은 일들을 도맡아 하는 전위군사가 된다. 그의 임무는 주력부대인 아시가루(足軽) 보병과 사무라이(武士) 기병이 조선의 수도인 한양으로 빠르게 진격할 수 있도록 정찰과 파괴활동을 통해 미리 전선을 터주는 역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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