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끝없는 여정" 45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45

어린 나이임에도 조금도 힘들어하지 않고 대덕산을 오르내리며 학업에 열중하는 딸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던 복돌은, 설화의 학구열을 대견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잔한 생각이 들어 마음이 뭉클해진다. 힘이 넘치는 장정들도 다니기 어려운 험한 산길을, 아이는 땀 투성이가 되어 오르내리면서도,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서당엘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설화야! 산길 오르내리는 게 많이 힘들 텐데––, 괜찮은 것이냐?” “아니, 괜찮아요. 중국말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횐데 견뎌내야죠. 그리고 제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요. 그래야 엄니처럼 저도 이담에 여류상인으로 우뚝 설 수 있지 않겠어요?” 복돌은 순간 딸 아이가 남몰래 앓고 있는 심통(心痛)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는 아차 하며 가슴을 친다. 복돌은 경성 ..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44

이즈음, 정기적으로 장(場)이 벌어지던 회령(會寧)과 경원(慶源)의 무역소(貿易所)가 갑자기 폐쇄되더니 여진과의 국경무역이 전면적으로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고, 급기야 조선반도에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한반도가 폐허의 땅으로 전락했던 때가 불과 30년이 안되었건만, 끔찍한 전쟁이 다시 벌어졌고, 주민들은 왜란 때의 참상을 떠올리며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명(明)나라를 정복하려는 후금(後金ㆍ여진)이 조선의 명나라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킨 것이다. 한양(漢陽)에는 반정(反正)이 일어나 나라님이 바뀌었고, 임금에 오른 인조(仁祖)는 북방외교에 있어 전임 광해군(光海君)과 달리 고집스럽게 친명배금(親明拜金) 노선을 주창하고 있었다..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43

(제5부) 혈맥(血脈)의 내력 눈(雪)의 여인 설화(雪花)의 앞날은 과연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눈은 하늘의 축복을 땅에 전해주는 천지신명(天地神明)의 전령사(傳令使) 같은 것이다. 눈은 청결하고 정직하여, 무욕(無慾)과 허심(虛心)을 의미한다. 눈은 순수함과 상서로움을 함께 지니고 있어, 더럽혀진 세상을 깨끗이 정화시켜 주기도 하지만, 또한 세상을 풍족하고 바르게 이끌어 주기도 하는 하늘이 보내준 은복(恩福)의 상징일 것이다. 비록 천덕꾸러기로 세상에 태어나 많은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야 했지만, 그러나 설화(雪花)는 눈(雪)이 품고 있는 깊은 가연(佳緣)을 몸에 지닌 채, 눈과 함께 세상에 온 특별한 여인이었다. 그건 설화가 이 나라 조선 땅의 한 편을 풍요롭고 맑게 채색해줄 특별한 여인이 될 것이라는..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42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옥례의 몸에는 한 방울의 체액마저 고갈되며 절망의 나락으로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그 순간 뿌연 허공에서 홀연히 나타나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는 “아가∙∙∙∙! 아가야∙∙∙∙! 내 아가야∙∙∙∙!” 하며 필사적으로 손을 뻗쳐 아이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때 난데없이 복돌이 나타나 원망스러운 눈길로 옥례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아이를 빼앗아 안고는 허공으로 멀어져 간다. 아이는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트리며 발버둥친다. 옥례는 멀어져 가는 아기에게 손짓을 하며 “아가야~~! 아가야, 가지마∙∙∙∙! 내가 네 엄마야~~.” 라고 애타게 부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옥례의 눈에 비친 마지막 환영(幻影)이었다. 갓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는..

소설 "끝없는 여정"-41

출발 셋째 날 저녁이 다 되어서야 함흥에 당도한 복돌은 외곽 약방과 시장을 돌면서 부지런히 약제를 납품하는 한편, 그 동안 궁금했던 함흥상단의 정황을 조심스럽게 파악하고 있었다. 한데, 뜻밖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함흥상단을 탈취하며 기세 등등하던 도방(都房) 최영섭은 알 수 없는 자객에 의해 횡사(橫死)를 당했고, 그와 결탁하여 함흥상단의 상권을 독점하려던 전 경성객주(鏡城客主) 이정홍(李貞洪)과 전 회령객주(會寧客主) 이원홍(李元洪) 두 형제는 최영섭 도방의 살인혐의를 받고 함경도 옥사에 구속된 상태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함흥상단 행수 등 그들의 추종 무리들은 모두 일망타진되어 대부분은 옥사에 갇히거나 아니면 외지로 뿔뿔이 흩어져 잠적해버린 상황이었다. 옥례를 핑계 삼아 대방을 죽이고 상단을..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40

눈이 많은 마을 눈골(雪村)은, 이십여 호의 마을 사람들에겐 작은 천국이다. 이곳은 낮이 늦게 시작되고 밤이 일찍 오는 탓에, 새벽부터 북적거리며 살아야 하는 도시 사람들의 일상(日常)을 반쯤 줄여 놓은 듯 유유자적하며 느리게 사는 생활공간이다. 게다가 마을사람 모두가 너그럽고 질박(質樸)한 품성을 지닌 탓에 작은 성취에도 큰 만족을 느끼는 무욕(無慾)의 자연공간이기도 하다. 가진 건 별로 없지만 서로 정(情)을 나누며 사는 곳––, 모두가 바둥대지 않고 느긋하여 여유로움을 느끼게 하는 곳––, 삶의 틈새로 끼어들기 십상인 사람간의 각축(角逐)과 질시(疾視)를 찾아보기 힘든 곳––, 읍내를 오르내리기엔 숨을 헐떡거려야 하는 험한 산골이지만, 살기엔 천국 같은 곳––, 그곳이 바로 산중마을 눈골(雪村)이다..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39

산남(山南) 약방에 머문 날짜가 벌써 두어 달 넘게 흘렀다. 옥례의 병세도 많이 호전되었고, 야위었던 풍모 또한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한때 장판을 뒤흔들며 맨몸으로 좌충우돌했던 여류 행수의 긴박한 무용담들––, 그녀가 처음 겪었던 경성(鏡城) 상권의 기억들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진한 흉터가 되어 가슴 한가운데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억제하기 어려웠던 절망과 분노의 감정들은 어느덧 숨이 잦아들면서 옛 이야기가 되어 서서히 가슴 속 밑바닥으로 내려앉기 시작한다. 김삼천 대방에 대한 얽히고 설켰던 상념들 또한––, 어차피 정으로 맺어졌던 인연은 아니었기에, 그와의 여러 복잡한 교합(交合)들 역시 세월의 흐름을 타고 서서히 멀어져 갈 것이다. 사람들 누구든, 갖고 있던 좋은 기억, 나쁜 기억..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38

옥례의 통곡은 그 동안 온몸으로 공들여왔던 모든 꿈들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비탄의 소리였고, 길고 긴 장정(長程)에 종말을 고하는 절규였다. 그러나 그 통곡은 아무런 감동도 남기지 못한 채, 하늘 먼 허공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옥례의 전성기는 이렇게 막이 닫히며 세상 저편 뒤안길로 흘러가고 있었다. 김삼천 대방이 없는 함흥상단에 옥례의 존재란 있을 수 없었다. 그저 상권 밖으로 내쳐져, ‘한때의 여류상인 장옥례’의 희미한 허상으로 기억되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던 대방어른도, 갇혀있던 둥우리를 깨고 탈출하겠다는 여인의 거센 몸부림도 모두 사라져버린 지금,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곤 겹겹이 상처로 찢겨진 빈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여태껏 쌓아왔던 모든 성취를 포기하고 원점으로 ..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37

뿌옇게 밝아오는 새벽빛은 밤사이 벌어졌던 난장(亂場)의 흔적 때문인지 안개가 낀 듯 회색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런 햇살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뜻밖에도 옥례였다. 그녀는 쓸어질 듯 허우적거리며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다. 어깨 부위의 심한 통증을 참으며 어렵게 발길을 내딛던 옥례는, 앞에서 다가오는 복돌을 발견하자 버텨오던 강단(剛斷)이 온몸에서 빠져나가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만다. 황급히 달려간 복돌은 조심스럽게 옥례를 부축하여 일으켜보지만, 탈진한 그녀는 허물어지듯 복돌의 가슴으로 쓰러진다. 그녀의 몸을 받아 안은 복돌은, 땀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을 소매로 닦아주며 걱정스럽게 말문을 연다. “상처가 심한데, 약방에서 쉬지 않고 어쩌려고 무리를 한 것이야? 넌 중환자야! 지금은 움직여선 안..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36

새벽녘 동이 트기 직전의 원광(遠光)이, 김삼천 대방을 향해 내닫고 있는 복돌의 발길에 희미하게나마 어둠을 헤쳐주고 있었다. 옥례를 업고 약방을 향해 뛸 때는 그야말로 깜깜절벽 같은 칠흑 속을 어찌 그리 가르며 힘차게 뛰었던가 싶어 신기한 생각이 든다. 별관의 바깥 대문을 들어서던 복돌은 갑자기 엄습해오는 알 수 없는 기운에 황급히 몸을 움츠린다. 안채 앞마당에는 여러 명의 상단 식구들이 모여 있었고, 그 앞에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가쁘게 몰아 대는 사람이 서있었다. 아직 해가 뜬 건 아니지만 새벽 여명이 어스름하게 그들의 윤곽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앞에 서있는 이는 바로 최영섭(崔英燮) 도방(都房)이었다. 그는 함흥상단의 2인자로써 대방을 대신하여 상단 조직과 조직원들을 총괄하는 인물이다. 최 도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