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많은 마을 눈골(雪村)은, 이십여 호의 마을 사람들에겐 작은 천국이다.
이곳은 낮이 늦게 시작되고 밤이 일찍 오는 탓에, 새벽부터 북적거리며 살아야 하는 도시 사람들의 일상(日常)을 반쯤 줄여 놓은 듯 유유자적하며 느리게 사는 생활공간이다.
게다가 마을사람 모두가 너그럽고 질박(質樸)한 품성을 지닌 탓에 작은 성취에도 큰 만족을 느끼는 무욕(無慾)의 자연공간이기도 하다.
가진 건 별로 없지만 서로 정(情)을 나누며 사는 곳––,
모두가 바둥대지 않고 느긋하여 여유로움을 느끼게 하는 곳––,
삶의 틈새로 끼어들기 십상인 사람간의 각축(角逐)과 질시(疾視)를 찾아보기 힘든 곳––, 읍내를 오르내리기엔 숨을 헐떡거려야 하는 험한 산골이지만, 살기엔 천국 같은 곳––, 그곳이 바로 산중마을 눈골(雪村)이다.
우여곡절 끝에 눈골을 삶터로 삼아 시작한 복돌과 옥례의 신혼살림은 처음엔 아주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 어색함을 덜어준 것은 다름아닌 옥례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였다. 아이는 뱃속에 있으면서도 어미와 아비가 함께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과제를 끊임없이 던져주고 있었다. 누구 한쪽의 힘만으로는 해결이 쉽지 않은 과제들이었다. 아이는 태어나기도 전에 어미와 아비의 어색한 관계를 미리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둘을 하나로 엮어주는 매개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이제 아이는 그런 연줄 탓에 복돌과 옥례 두 사람의 아이임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가장 평범한 요건 중의 하나는 뭐니 뭐니 해도 안락한 가정을 이루는 일일 것이다. 행복의 원천은 바로 가정에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물론 모든 가정이 단숨에 화목해지거나 일시에 행복이 몰려오는 건 아닐 것이다.
남남 간에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가노라면, 서로 다른 성정(性情)과 생각으로 한때 반목과 혼란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서서히 조화를 이루면서 너와 내가 하나로 묶여지는 순간, 멀게만 느껴졌던 이질감은 씻은 듯 사라지고 몸과 마음은 잔잔한 수면처럼 평안을 찾을 것이다.
치열함 대신 느슨함이 있는 곳––,
의심과 경계 보다는 믿음과 관용이 있는 곳––,
이유와 조건을 따지지 않고 응답해주는 곳––,
자아(自我)가 아닌 무아(無我)가 흐르는 곳––,
그곳이 바로 행복을 생성해주는 가정일 것이다.
벽지마을 눈골이 작은 천국을 이루게 된 건, 20여호의 개별 가정들이 동화(同和)의 과정을 거친 끝에 큰 가정을 이루며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매일매일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탐욕의 노예처럼 어그러진 삶을 살아왔던 옥례––.
그녀는 소박한 가정의 안온함이 행복을 불러오는 원천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몸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임을 깨닫는다.
‘평범해서 보이지 않던 아주 작은 곳에 행복이 숨어 있을 줄이야––!’
이때까지 여자로서는 치명적인 흠결을 달고 살아온 자신에게 변함없는 헌신과 정성을 쏟아준 복돌이 있었기에, 이런 행복을 뒤늦게 누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젠 당연히 내 차례이지! 내가 그이를 행복으로 이끌 차례이지––!”
라며 그녀 역시 오로지 복돌 만을 바라보며 낭군인 그에게 끝없는 헌신을 보내리라 마음먹는다. 행복은 벼락처럼 순식간에 다가오는 것은 아니지만, 한쪽이 지성으로 던져주는 것을 다른 한쪽이 감동으로 받아들일 때 행복은 채워질 것이요, 주는 이와 받는 이가 서로 엇나갈 때 행복은 서운하여 멀리 도망가 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의 원리가 아니겠는가!
이곳 평화로운 터전에서 옥례는 출산 날을 기다리며 몸을 추스르고 있다.
산월(産月)이 가까이 다가오고 배는 달덩이처럼 커졌지만, 엄니와 이모 등 산파(産婆) 못지않은 조력자들이 마을에 즐비했기 때문에 출산에 두려움이나 걱정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복돌 역시 산모가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을 회복하며 안정을 되찾아가자, 약제를 싣고 함경도 일대를 향해 본격적으로 긴 여상(旅商)을 떠나야 했다. 한번 여상을 떠나면 아무래도 보름은 족히 걸려야 하지만, 아직은 출산일이 달포 가까이 남아있었고, 두분 엄니들이 산모를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었으므로 마음 놓고 노정을 밟을 수 있는 여건이 된 것이다. 여전히 그는, 지금은 의원이신 이형석 점주의 아들인 덕현(德鉉)과 함께 산남(山南) 약제상점의 영업을 책임지고 있는 입장이었고, 특히 약제거래에 관한 한, 함경도 일대의 약방과 의원, 객주 및 거간꾼들, 그리고 보부상들에 이르기까지 복돌 만큼 그들을 연계하며 꿰뚫고 있는 사람은 찾기 드물 정도였다. 게다가 큰 도시에서 막대한 자금을 풀어 상권을 쥐락펴락하는 몇몇 상단들의 약제 판매망 역시 복돌은 손바닥 보듯 꿰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된 건 전적으로 함흥상단의 경성행수로 있었던 옥례 덕분이었다.
아직 사방이 어둠에 쌓여 있는 새벽녘––, 여상(旅商)을 떠나야 하는 복돌은 잠시나마 옥례와 헤어지는 것이 못내 서운했던지 얼른 출발을 못하고 주춤거린다.
“오라버니, 서둘러 출발해야 부전(富田)을 거쳐 오늘 중으로 장진(長津)에 도착할 수 있어요. 한동안 약제를 못 받았으니 약방에서는 오늘 오나 내일 오나 하며 학수고대하고 있을 거예요. 아마도 지금쯤 약제 재고가 모두 바닥 났을 거예요. 나는 걱정 말고 어서 다녀오세요. 몸조심하시고요––.”
“알았어 부지런히 다녀 올게. 어디 불편한 데라도 생기면 엄니한테 알려드리고--, 알았지?”
복돌은 그러고 나서도 한참이나 옥례 곁을 떠나지 못하다가 두분 엄니의 재촉을 받고 나서야 어슬렁거리며 어렵사리 눈골을 출발한다.
옥례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마을 어귀까지 나와 배웅을 했고, 복돌은 몇 번이고 뒤돌아보며 그녀에게서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뒤늦은 연분이 이리도 애절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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