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山南) 약방에 머문 날짜가 벌써 두어 달 넘게 흘렀다.
옥례의 병세도 많이 호전되었고, 야위었던 풍모 또한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한때 장판을 뒤흔들며 맨몸으로 좌충우돌했던 여류 행수의 긴박한 무용담들––, 그녀가 처음 겪었던 경성(鏡城) 상권의 기억들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진한 흉터가 되어 가슴 한가운데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억제하기 어려웠던 절망과 분노의 감정들은 어느덧 숨이 잦아들면서 옛 이야기가 되어 서서히 가슴 속 밑바닥으로 내려앉기 시작한다.
김삼천 대방에 대한 얽히고 설켰던 상념들 또한––, 어차피 정으로 맺어졌던 인연은 아니었기에, 그와의 여러 복잡한 교합(交合)들 역시 세월의 흐름을 타고 서서히 멀어져 갈 것이다. 사람들 누구든, 갖고 있던 좋은 기억, 나쁜 기억을 세월에 실어 먼 곳으로 흘려보낼 수 있기에~~, 마음을 훌훌 털며 평정을 되찾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여겨진다. 몰려드는 회한과 격앙 속에서 망각이 없다면 어찌 그 사람이 미치지 않고 온전히 살아 갈수 있겠는가!
본인도 모르고 있었던 옥례의 임신 사실은 이형석(李亨錫) 어른이 진료 중에 발견하여 이를 엄니인 창분(彰芬)에게 은밀하게 전했고, 망설임 끝에 어렵게 말을 꺼낸 엄니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듣고는 그때서야 옥례도 자신이 임신했음을 알게 된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과 함께 혼란에 빠진다.
‘하––,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어쩐지 몸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게 임신이라니!’
이건 원하지 않는 임신이었고, 해서는 안 될 임신이었다.
그러나 옥례의 임신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복돌(福乭)은, 스스로 내린 결심을 태연하게 모두에게 밝힌다. 자신이 태아의 아비라는 것과 옥례와 함께 정성을 다해 이 아이를 키울 것이라는 것을 창분(彰芬)과 순옥(順玉), 그리고 옥례(玉禮) 앞에서 맹세하듯 힘주어 말한다. 또한 두분 엄니께 옥례의 산전 조리와 출산을 각별히 챙겨줄 것도 함께 부탁한다. 뜻밖의 이야기에 당황한 옥례는 얼굴이 상기되며 벅차오르는 감회에 젖는다. 자신을 향해 품고 있는 복돌의 진정을 다시 한번 느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창분은 딸의 임신 소식을 듣고는 혹시 경성(鏡城) 장사판에 휩쓸리면서 아비 없는 아이를 가진 게 아닌가 하여 낙담하고 있던 중이었다. 창분의 혈족은 그저 적출도 서출도 아닌, 드러내기 곤란한 남성을 통해 외동딸 하나씩을 낳아 혈맥을 이어온, 말하자면 창분 자신은 물론 그의 엄니도 또 그 윗대도 모두 아비 없는 사생아를 낳아 모녀로 이어지는 반쪽짜리 가계(家系)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을 한(恨)으로 여기며 지금껏 살아온 창분은, 자신의 딸 옥례만은 어엿한 가정을 이루어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길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딸이 장사판으로 뛰어들면서 그 기대를 사실상 포기하고 있던 중이었다.
뜻밖에도 아이의 아비가 복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아니, 걱정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해야 할 일이었고 오랜만에 맞는 큰 경사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둘은 부부로 맺어질 사이로 일찍이 점지하고 있지 않았던가!
옥례 역시 대방과의 부끄러운 행실이 드러나면 무어라 변명을 해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던 터에, 복돌의 선언으로 일단은 고비를 넘길 수 있어 큰 근심거리를 덜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행적을 낱낱이 알고 있는 복돌을 아이의 아비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고, 조만간 엄니에게는 사실대로 실토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엄니와 순옥 이모가 장을 보러 간 사이, 복돌과 옥례는 뒷산으로 산책을 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어째서 아이 아비라고 자청을 하고 나선 거야? 물론 나를 위해 아이 아비가 돼주겠다는 오라버니의 심정은 잘 알지만, 그렇다고 앞뒤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오라버니가 아이의 아비 노릇을 한다는 건 말이 안되잖아! 어차피 아비 없이 태어날 아이니 팔자려니 생각하고 내가 키우는 수밖에∙∙∙∙. 아무튼 엄니께 사실대로 말씀 드려야겠어!”
옥례는 제법 체념 섞인 목소리로 심사를 털어놓았다.
“옥례야! 네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 아이는 우리 둘 아이로 입적시키는 게 좋겠다. 두분 엄니들도 당연히 우리 아이려니 하고 기뻐하시는 걸 너도 봤잖아! 우리 둘이 키우면 되는 걸 굳이 그분들을 실망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다른 것 생각 말고 아이를 생각해야 돼. 너나 나나 아비 없는 아이로 자라면서 수없이 천대를 받으며 서럽게 살아 왔잖아! 아비 없이 자라는 건 아이에겐 몹쓸 짓이야. 가급적이면 양친 밑에서 자라나야 제대로 클 수 있어. 그게 아이에게 훨씬 이롭다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추후에 네가 상인으로 다시 재기할 때를 생각해서라도 내가 아비로 있는 게 나아. 너에게 분명히 말하지만 난 절대 이 아이를 우리 아이로 보란 듯이 키울 자신이 있어. 이 아이는 우리 아이야. 너 혼자만의 아이가 아니야.”
가슴을 콕콕 찌르는 복돌의 이야기를 듣고는, 감동의 흐느낌인지 설음의 흐느낌인지 또 한 번 옥례의 긴 흐느낌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긴 대화 끝에 결국 둘이 이 아이의 부모가 되기로 언약이 이루어졌다. 또한 복돌이 오랫동안 염원한 대로 둘은 부부가 되어 새로운 삶을 펼쳐 나가기로 했다. 정말로 긴 세월이 흐른 끝에 아이로 인해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버릴 수 없는 미련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존재인 것 같다.
그 미련이라는 건, ‘세상 속 삶’과 ‘마음 속 삶’이 서로 평행선을 이루고 있을 때 뚜렷하게 드러난다. 세상 속 현실과 마음 속 환상은 항상 충돌을 일으키며, 미련을 낳는다.
몸이 찢겨져 만신창이가 될지라도 기어이 이루고 싶었던 ‘여류상단(女流商團)’에 대한 야망––, 이건 지금 이 순간에도 옥례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버릴 수 없는 꿈이다.
복돌과 함께 아이를 키우며 평범하게 살아보겠다는 ‘세상 속 삶’과, 장판을 누비며 야망을 실현해보겠다는 ‘마음 속 삶’이 맹렬히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지금, 그녀는 마음 속 삶을 미련으로 접고 세상 속 삶을 택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산중마을 눈골(雪村)로 거처를 옮겼고, 그곳에는 이들 부부의 집이 별도로 꾸려졌다. 원래 창분네 집과 순옥네 집은 울타리 없이 아래 위로 붙어 있었는데, 창분이 순옥 집으로 합치고 복돌과 옥례는 창분 집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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