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부)
혈맥(血脈)의 내력
눈(雪)의 여인 설화(雪花)의 앞날은 과연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눈은 하늘의 축복을 땅에 전해주는 천지신명(天地神明)의 전령사(傳令使) 같은 것이다.
눈은 청결하고 정직하여, 무욕(無慾)과 허심(虛心)을 의미한다. 눈은 순수함과 상서로움을 함께 지니고 있어, 더럽혀진 세상을 깨끗이 정화시켜 주기도 하지만, 또한 세상을 풍족하고 바르게 이끌어 주기도 하는 하늘이 보내준 은복(恩福)의 상징일 것이다.
비록 천덕꾸러기로 세상에 태어나 많은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야 했지만, 그러나 설화(雪花)는 눈(雪)이 품고 있는 깊은 가연(佳緣)을 몸에 지닌 채, 눈과 함께 세상에 온 특별한 여인이었다. 그건 설화가 이 나라 조선 땅의 한 편을 풍요롭고 맑게 채색해줄 특별한 여인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할머니와 마을사람들이 보내는 설화(雪花)에 대한 따가운 눈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미운 둥이 설화가 오히려 사람들을 끌어당기며 그들의 증오심을 뿌리쳤기 때문이다.
아이는 헤프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잘 웃었지만, 그러나 웬만해선 울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처지를 알기라도 하는 듯, 이 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방긋방긋 웃음을 보내며 붙임성 있게 잘 따라주었다. 아이의 웃음에는 굳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주는 신비의 힘이 있었다. 워낙 제 어미의 생김과 판박이라 누가 봐도 정을 듬뿍 주고 싶을 만큼 맑고 예쁜 아이였기에 누구인들 눈총을 줄 틈이 없었다.
순옥과 창분 두분 할머니는 아이에게 안쓰럽고 애처로운 마음을 지을 수 없었다.
물론 옥례를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이 찢겨 나가는 아픔을 견디기 어려운 중환의 상태지만, 그러나 제 어미 옥례는 어차피 명줄이 짧아 이르게 세상을 떠나간 것인데, 이 갓난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저주와 눈총을 그리도 야멸차게 퍼부었던가 하는 자책에 휩싸인다. 할미랍시고 어미 젖 한번 못 먹어보고 암죽을 삼키느라 허발하는 어린 것을 가여워 하긴커녕 미워하고 구박하며 방치했던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되어 가슴이 저려온다. 그런 탓인지 두 할머니의 설화 사랑은 세상 어느 것 하고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더 깊고 더 애절했다. 천덕꾸러기 아이는 눈에 띄게 영리했고, 눈치가 빨랐다. 그렇게 설화는 세상을 이겨내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아비 복돌은 집에 없었다. 함흥상단 대방 김영택(金英澤)의 요청으로 지금은 옥례가 펼쳤던 경성(鏡城), 회령(會寧) 등 함경도 북방지역의 상권을 책임지는 행수를 맡아, 벌써 3년째 국경무역과 시장거래에 전념하고 있었다.
설화는 나이 예닐곱쯤 되자 이삼 일에 한 번씩 이웃집 언니 정옥(貞玉)과 함께 갑산(甲山) 산남(山南) 읍내로 내려가 서당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정옥의 아버지 최건선(崔建善)은 과거 두만강 강변 파수병으로 차출되어 국경을 지키는 병사로 근무했었으나 부상을 입고 전전하던 끝에 이곳 대덕산 눈골마을로 들어온 사람이었다. 정옥은 나이가 열살쯤 이어서 예닐곱쯤인 설화를 친동생처럼 챙겨주었고, 설화도 잘 따랐다.
설화와 정옥이 서당에서 배우고 있는 분야는 여자로서는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산남 읍내에는 오십이 다된 훈장님이 자영서당(自營書堂)을 개설하고 천자문과 동몽선습, 유학(儒學)의 경전인 사서삼경(四書三經) 등을 가르쳤고, 인근에 거주하는 이 십여 명의 학동들이 글이나 깨우치겠다는 심산으로 서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훈장님은 칠십이 넘은 부친을 모시고 함께 살고 있었는데, 훈장님 부친은 왕년에 사신을 따라 명나라를 오가던 역관(譯官) 출신이었고 함자는 민철규(閔哲圭) 어르신이었다.
그는 조선 말 못지않게, 중국에서 일상언어로 통용되고 있는 근고한어(近古漢語)를 능숙하게 구사하시는 어르신이었다. 지금은 연로하여 거동이 다소 불편하신 터라 귀향하여 집에서 소일하며 지내시는 중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복돌은 산남 약제상 이형석 어른과 함께 여러 차례에 걸쳐 민철규 어르신을 찾아가 간곡히 청하며 설득한 끝에 용케도 설화와 정옥이 중국말을 배울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든 것이다. 매우 드물게도 설화와 정옥은 민철규 어르신을 독선생으로 모시고 중국의 근고한어(近古漢語)를 배우게 된 것이다.
이는 여류상단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옥례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설화에게 엄마의 뜻을 이어받아 그 꿈을 이루게 하려는 복돌의 욕망과 의지의 표현이었다.
복돌의 생각은 설화를 제 어미 대신 국경만상(國境灣商)의 대방으로 키울 작정이었다.
호기심이 많고 학구열이 강한 설화는 중국어 학습은 물론 유교 경전에도 관심이 깊어 학습에 열의를 다할 뿐만 아니라 서당 일과가 끝나면 곧장 산남 약제의 이형석 의원을 찾아가 약제와 의술을 배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서너 살은 어린 나이지만 유달리 성숙해 보이는 설화는 서당에서는 보기 힘든 소녀 학동이었다. 사실 계집아이가 서당에서 사내아이들과 함께 글공부를 한다는 것은 전혀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여인의 글공부는 대개 집안에서 학문에 밝은 인척을 독선생으로 모시고 글을 배우는 게 관례였는데, 설화가 서당에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산남 약제의 이형석 어르신 덕분이었다. 특히 중국어를 가르치시는 민철규 어르신은 설화를 친손녀 이상으로 예뻐하시며 즐거운 마음으로 설화를 가르치고 계셨다.
설화의 학습 태도는 사내아이들 못지않게 집중력이 뛰어났고 암기력 또한 대단했다. 특히 눈이나 입으로 암기하는 공부가 아니라 마음으로 섭렵(涉獵)하는 공부방식을 습관화했기 때문에 누구도 설화의 학습진도를 따라 갈 수 없었다. 설화의 혼신을 다하는 학습태도에 주변 학동들은 부러움과 시기심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으나, 그보다는 그녀의 빼어난 미모에 마음을 뺏겨서 그런지 그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느라 여념이 없는 학동들이 많았다. 애나 어른이나 남자들이란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는 모두들 순한 양으로 변신하는 모양이다. 자연 그들의 학습 진도는 제자리에 멈춰선 지 이미 오래였고, 서당을 오고 가는 목적은 필경 따로 있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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