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끝없는 여정" 45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25

복돌(福乭)은 닷새 전쯤 함흥을 떠나 대덕산 눈골마을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고, 약제와 버섯 등 산물(山物)들을 달구지에 가득 싣고 원산을 거쳐 밤 늦게 함흥에 도착했다. 마침 함흥상단에서 연회가 열리고 있어 화물도 부리지 않은 채 연회장의 말석에 참석했고, 좌중을 압도하며 표표히 앉아 있는 옥례를 멀리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움을 한껏 발산하며 좌중의 시선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여유로운 표정 뒤에는 어두운 불안감이 숨겨져 있었다. 아니, 복돌에게만 보여지는 안쓰러운 모습일 것이다. 아마도 대방(大房)어른에게 잘 보여 어떻게든 출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이 그녀를 옥죄고 있는 불안감의 실체일 것이다. 그런 허망할지도 모를 욕망에 함몰되어 있는 옥례를 바라보면서 복돌 역시 견딜..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24

함흥상단 대방(大房)어른의 환대를 뒤로하고 숙소로 돌아온 옥례는 벅찬 환희와 함께 무거운 번민에 빠져든다. 함흥상단의 일원이 되어 정식 상인으로 입적해도 좋다는 대방어른의 허락이 있었고, 현재의 약제거래 외에 함경도 큰 시장 중의 하나인 경성(鏡城)지역 시장의 거래를 책임지고 맡아보라는 언명도 있었다. 대방어른은 이런 내용을 상단을 총괄하고 있는 도방(都房)을 불러 직접 지시하고, 옥례를 빠른 시간 안에 상단의 정식 상인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수련을 시키라는 하교까지 내려주었다. 옥례에게는 파격적인 혜택이 아닐 수 없었다. 야무지게 나름의 기질을 발휘해 시장상권을 이끌어 나간다면,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중견상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여망(輿望)의 길이 그녀 앞에 훤하게 열린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될 수 있..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23

함경도와 강원도의 약방을 정기적으로 순방하기 위해, 옥례(玉禮)는 주로 함흥(咸興)에 머물기로 했다. 함흥이 지역적으로 북쪽 회령(會寧)과 남쪽 원산(元山)의 중간지점쯤 되기 때문에, 언제든 다른 객주의 부름을 받거나 물건을 급송해야 하는 경우 오르내리기가 편리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함흥객주의 거래규모가 회령의 이가객주(李家客主)나 원산의 권가객주(權家客主)에 비해 월등하게 클 뿐만 아니라, 함흥객주 김삼천(金參千)이 두만강 변의 국경무역(國境貿易)을 관장하는 함흥상단(咸興商團)의 대방(大房–상단의 주인)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령(會寧)과 경원(慶源)에는 여진부족(女眞部族)과의 공무역(公貿易)과 사무역(私貿易)을 관장하는 무역소(貿易所)가 설치되어 국경무역이 활발하게..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22

눈골마을이 한창 분주해졌다. 개마고원에도 봄이 온 것이다. 겨우내 강추위를 견디며 잘 자라준 밀과 보리를 거둬들이는 건 물론이고, 함경도와 강원도의 객주집 객상(客商–객주가 운영하는 상점)과 여상(旅商)을 통해 약방으로 풀려나갈 버섯이며 약초를 채집하느라 마을사람 모두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눈골마을의 하루 일과는 동이 트기 전 칠흑 같은 새벽녘부터 시작된다. 촌장(村長) 어른이 두드리는 징 소리가 산중에 울려 퍼지면, 모두들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전날 밤 마련해둔 밥 덩이를 어깨에 둘러메고는 횃불을 받쳐든 채, 마을 북편 광장(廣場)으로 모여든다. 혹여 조금이라도 지체를 했다 가는 마을 촌장이신 최씨(崔氏) 어른으로부터 호되게 치도곤(治盜棍)을 당하기 때문에 졸린 눈을 비벼가며 서..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21

그러나 창분의 시름은 길지 않았다. 개마고원의 삶에 대해 그녀에게 후회는 없었다. 아니, 한(恨)도 많았지만, 흥(興)도 있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인연으로 이곳 고산준령까지 밀려들어오긴 했지만, 새 찬 웅풍(雄風)과 매서운 혹한(酷寒)을 몸에 익히며 나름 맹렬히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생애 두 번째의 선택이 창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선택은 그녀의 것이 아닌, 딸아이 옥례를 위한 선택이어야 했다. 파고(波高)에 휩쓸린 편주(片舟) 신세였던 여인네, 창분––! 그녀의 몸에 잉태된 업보로, 준령험산의 산 처녀가 되어버린 딸아이 옥례––, 그리고 이 다음 옥례가 낳을 자녀와 이를 이을 후예들––. 그들을 산짐승들이나 노니는 개마고원의 토박이로 살게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20

“약재 장사도 이제는 더 이상 해먹기가 어려울 듯싶어요.” 이형석은 무슨 요량이라도 숨겨 놓은 듯, 우선 엄살부터 늘어놓는다. “한동안 함경도 땅에서는 웬만하면 우리 약재를 쓰지 않은 약방이 별로 없었는데, 이제는 다 옛날 예기가 될 판이네요. 요즘 전란 후유증으로 외상(外傷)환자 내상(內傷)환자 할 것 없이 병자가 크게 늘어나고 있어, 약국과 약재상이 제철을 만난 듯 한참 성황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데 뭐가 문제란 건가요? 약재상이 성업을 이루면 이씨 어른에게도 좋은 일 아닌가요?” 그는 현실을 이해 못하는 창분네가 답답하게만 느껴졌던지 목소리에 힘이 빠진다. “글쎄, 그렇게만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어요∙∙∙∙. 약재상이 제법 장사가 된다 싶으니까 여기저기 약재가게가 난립하고 있는데 다..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19

살상의 땅에 내린 하늘의 죄업이던가? 조선의 산하는 조선의 모습이 아니었다. 미려했던 조선반도는 온통 찢기고 뭉개진 채 상처투성이의 폐허로 변해버렸고, 냉기뿐인 산촌(山村) 여기저기에는 창궐하는 질병에 허덕이는 수많은 백성들이 고통에 시달리며 내뿜는 신음소리가 생(生)과 사(死)의 허공을 처연하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구제해줄 손길은 아무데도 없었다. 병자(病者)는 여기저기 널려 있지만, 병을 고쳐줄 의원을 만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에 별 따기나 다름없었고, 그나마 어렵사리 의원을 만난다 손 치더라도 대부분의 의원들이 환자에게 내려줄 약방문 하나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 약제를 잘못 쓰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그만큼 의원들의 의술이란 게 지극히 보잘것없었고, 거기다 제대로 된 의..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18

(제3부) 사랑의 행방(行方)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훤칠한 미모의 여인, 옥례(玉禮)! 그녀는 두메산골 벽지에 묻혀 사는 한갓 시골 처녀에 불과하지만 외모가 빼어나게 돋보여 마치 깊은 산속에서 불현듯 내려온 선녀를 연상케 하는 여인이다. 어쩌다 그녀가 읍내 장터에라도 나타나는 날이면 많은 남정네들이 가던 길을 멈춰선 채 눈길을 보내느라 정신을 못 차린다. 전혀 윤색(潤色)되지 않은 건강미인이랄까, 아니면 자연미인이랄까∙∙∙∙. 얼굴은 청순하지만 몸매는 육감적이어서 어쩌면 차가움과 뜨거움을 동시에 발산하는 순진무구한 냉열미인(冷熱美人)이라 하는 게 맞을 것 같은 그런 여인이다. 당연히 그녀는 남심(男心)을 흔들어 놓는 그야말로 뇌쇄적 마력을 지닌 여인이다. 이런 천부(天賦)의 미모가 그녀의 생(..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17

한편, 조선반도(朝鮮半島)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전란을 겪으면서 폐허의 땅으로 변해가던 조선반도에 소생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명(明)나라의 지원군이 패색 짙은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한반도로 진주하면서, 상대적으로 일본군(日本軍)의 위세는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한다. 특히 이여송(李如松) 장군이 이끄는 명나라 지원군과 의기(意氣)를 되찾은 조선 관군(官軍) 및 의병(義兵)들이 연합군을 이뤄 총 공세를 펼친 끝에 잃었던 평양성(平壤城)을 탈환하는데 성공했고, 전황은 급변한다. 함경도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이끄는 일본 제3군은 퇴로가 차단될 것을 염려했던지 급하게 철군을 서둘러 한양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했고, 일시적으로 무주공산을 이룬 함경도는 한때 국경인(鞠景仁) 반..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16

한식(漢植)을 잃고 한동안 마음 고생이 심했던 창분은 아직 원기가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그야말로 강행군을 펼치며 산악을 헤매다 보니 그만 체력의 한계에 부딪치고 만다. 순종(順從) 여인에서 강철(强鐵) 여인으로 변신한 그녀는 산간벽지 눈골마을의 자력갱생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막무가내로 쏟았던 체력이 탈진되더니 지독한 몸살로 이어졌고, 그로 인해 심한 오한과 헛구역질을 견뎌야 했다. 문득 헛구역질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전에 엄니가 하던 말이 떠올라 산에서 캐낸 생강과 칡뿌리 갈근을 다려서 며칠을 마셔보았지만, 별 효험이 없었다. 왜 그런 건가 의심을 품으며 이리저리 손가락 셈을 하다 보니 아니나다를까, 창분의 몸에 이상한 징후가 나타나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퍼뜩 뒤돌아보니 어쩐 일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