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돌(福乭)은 닷새 전쯤 함흥을 떠나 대덕산 눈골마을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고, 약제와 버섯 등 산물(山物)들을 달구지에 가득 싣고 원산을 거쳐 밤 늦게 함흥에 도착했다.
마침 함흥상단에서 연회가 열리고 있어 화물도 부리지 않은 채 연회장의 말석에 참석했고, 좌중을 압도하며 표표히 앉아 있는 옥례를 멀리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움을 한껏 발산하며 좌중의 시선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여유로운 표정 뒤에는 어두운 불안감이 숨겨져 있었다. 아니, 복돌에게만 보여지는 안쓰러운 모습일 것이다. 아마도 대방(大房)어른에게 잘 보여 어떻게든 출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이 그녀를 옥죄고 있는 불안감의 실체일 것이다. 그런 허망할지도 모를 욕망에 함몰되어 있는 옥례를 바라보면서 복돌 역시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에 빠져들었고, 그것은 애련한 아픔으로 그의 가슴을 저리게 하고 있었다.
‘난장판이나 다름없는 이곳 장사판보다는 차라리 정겨움을 느낄 수 있는 느릿한 눈골마을에서, 고되긴 하더라도 농사 짓고 약초 캐며 가족들과 함께 오순도순 살아가는 게 한결 행복한 삶일 텐데∙∙∙∙’, 하는 생각이 복돌의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기필코 산골 오지마을을 떠나 새롭고 넓은 세상에서 한껏 나래를 펼치며 살아보려는 그녀의 용기 넘치는 야망을 그 누가 꺾을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여인 옥례의 행로가 도무지 미덥지가 않았지만, 그녀를 지켜줄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의식을 복돌은 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를 자신의 각시로 맞아들여 언젠가는 단란한 가정을 꾸려보겠노라며 가슴 벅찬 기대에 빠져 있던 복돌은, 이 모든 꿈이 허사로 끝나가고 있구나 하는 전조(前兆)를 느끼며 깊은 심통을 앓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신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녀를 기다려야 한다고 복돌은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곧바로 여각 옆 창고로 돌아온 복돌은 이런 상념을 털어 내기라도 하 듯, 싣고 온 물품을 분류하여 창고에 적재하느라 밤 늦게까지 땀을 흘린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으나, 그때까지 옥례의 여각에는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것인가?
복돌은 여러 날 행상으로 이어졌던 원로(遠路)가 힘에 부쳤던 지 여각(旅閣) 외곽에 있는 자신의 침소에서 깊은 잠에 빠져든다.
한편 옥례는 밤이 깊었으나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진로가 너무도 흥분되어 잠이 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회장에서 잠깐 눈에 띄었던 복돌을 만나 오늘 있었던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충동이 가슴 속에 차올랐지만, 자시(子時)를 넘어선 시각인지라 한참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일까지 기다리기엔 너무나 마음이 벅차올라, 결국 방을 나선 옥례는 멀지 않은 복돌의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얼마나 잤을까~~.
복돌은 잠결에 얼핏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시각에 이곳에 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하며 생시와 꿈결의 사이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있노라니 인기척은 바로 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깜깜한 한밤중인지라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았으나 익숙한 몸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앞에 멈춰선 채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다름아닌 옥례였다.
온전히 정신이 들었지만 눈을 감고 자는 척하며 그녀가 돌아가길 기다리고 있던 복돌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체취가 복돌의 온몸을 자극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복돌은, 격렬하게 그녀의 몸을 자신의 가슴으로 품어 안는다. 어려서부터 많은 세월을 함께 지내오는 동안 꿈속에서나 혹은 상상 속에서 그녀를 수없이 안아보았지만, 실제로 그녀를 가슴에 품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의 몸은 큰 구름 같기도 하고 맹렬한 파도 같기도 하여 꿈속의 여인과는 다른 깊은 여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당황한 여인은 순간 남자를 밀어내느라 상체를 뒤로 젖히며 완강히 저항했으나, 남자의 압박은 더욱 거세지면서 여인을 이브자리 위로 쓰러트리고는 맹렬히 몸을 파고들며 압축해 왔다. 남자는 이미 자제력을 잃은 상태였고, 오직 여인을 제압하여 자신의 여인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야욕에 사로잡혀 있었다.
옥례는 순간 복돌을 응시하며 불현듯 대방어른을 떠올린다. 어차피 함흥상단의 여인으로 대방어른이 시키는 대로 몸을 부리기로 마음먹은 이상, 자신의 첫 남성은 누구보다도 오매불망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이 남자여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복돌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양심이라고 생각했고, 앞으로 혼인할 생각도 가정을 꾸릴 생각도 없는 처지이니 복돌을 마음의 신랑으로 삼아 평생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자신에게 닥쳐올 공허함을 이겨내는 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몸을 지키기 위해 죽기 살기로 밀어내던 옥례는, 순간 복돌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성(性)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별로 없었지만 사내가 원하는 대로 편안하게 몸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몸은 한없이 떨리고 공포와 고통이 전신을 휩쓸고 있어 견디기 어려웠지만, 그러나 파고가 서서히 밀려오면서 그녀의 몸은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고통은 쾌락으로 공포는 전율로 점차 바뀌어지더니, 곧이어 온몸이 출렁이며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강렬한 희열을 일시에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야망에 떨고 있는 옥례의 몸에는 첫 남자 복돌의 진한 체온이 또렷이 새겨져 지워질 수 없는 깊은 화인(火印)으로 남는다.
폭풍이라도 지나간 듯 방안은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등잔에 불을 붙인 복돌은 진정 어린 손길로 옥례를 감싸 안는다. 옥례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이들 남녀의 향방은 그들이 살아왔던 개마고원과 유사한 인생의 고산준령을 넘어야 하는 험준한 행로에 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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