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끝없는 여정"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26

추동 2020. 12. 9. 21:30

 

“∙∙∙옥례야~, 내가 미쳤었어––, 너를 범하다니, 어쩌다 네게 큰 죄를 짓고 말았어––. 너를 너무 좋아하다 보니∙∙∙∙,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말았어~~. 내 마음은 너도 잘 알고 있을 거야~~. 오늘밤 일은 잘못된 일이야. 하지만 우리는 신랑 각시가 될 거라고 믿고 지금껏 지내왔잖아. 나는 그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지금껏 기다려왔어. ~~두 분 엄니들도 오래 전부터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계셨어. 그걸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이렇게 된 바에 이제 우리 혼인을 올리기로 하자~~. 내 어떻게 하던 너만은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둘이 힘을 합쳐 엄니들 편안히 모시면서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살고 싶어!”

 

옥례를 범한 자신의 행위는 지극히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심으로는 오히려 잘된 일일는지 모른다고 복돌은 자위했다. 지금까지 막무가내로 빠져들기만 하며 멈출 줄 모르는 옥례의 야망에 불안감을 느껴오던 복돌은, 이 기회에 확실하게 자신의 여자로 만들어 헛된 욕망의 수렁에서 그녀를 건져내야 한다고 마음먹었고, 이를 밀어붙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옥례는 입을 다문 채 초점 없는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상단(商團)에서 전개될 가슴 벅찬 진로를 복돌에게 알리고 함께 기쁨을 나눠보려던 의도가, 오늘 밤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져 버렸기에 도저히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망설임 끝에 복돌의 몸을 받아들인 것은 그의 여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껏 고이 지켜오던 처녀를 잃었다는 것은 옥례에게 견딜 수 없이 아프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어차피 여인의 몸으로 남성들 세상인 장사판에서 새로운 인생을 펼쳐보겠다고 나선 이상, 순결이니 절개니 하는 것에 연연하는 것은 이제 그녀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허상(虛想)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버리게 될 순결이라면, 목숨처럼 자신을 아끼며 사랑을 보내왔던 복돌에게 주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 도리라고 생각했다.           또한 향후 활동에 제약이 될 수도 있는 순결을 버렸으니, 남성 세계에서 벌일 자신의 행동거지가 더욱 자유롭고 자신만만해질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상상도 해본다. 오늘밤의 의미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녀의 상념 속에서, 항상 자신의 발길을 붙잡으며 가슴을 뻐근하게 하는 가족이라는 사슬에서 벗어나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이미 자신은 가정(家庭)의 규범이니 가족(家族)의 정리(情理)니 하는 것들을 포기한지 오래였으므로,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정(情)과 연(緣)의 인맥을 홀가분하게 털어내겠다는 고통스런 뜻이 배어 있었다. 오늘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날이지만, 그러나 생(生)의 틀을 바꿔놓는 잊을 수 없는 날이기도 했다.

 

한참 후 옥례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조용히 한마디를 남기고 복돌의 곁을 떠났다.

 

나 오라버니하고 혼인할 수 없어! 그리고 엄니에게도 돌아가지 않을 거야! 대신 오라버니가 우리 엄니∙∙∙∙, 잘 보살펴 주었으면 좋겠어. 부탁할게!”

 

옥례와 복돌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으나, 애당초 부부로서 인연을 맺기는 어려운 팔자였다. 어려서부터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앞날을 기약한 정인(情人)처럼 살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철이 들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완연히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현실(現實)에 대한 수용(受容)도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상(理想)도 서로 판이하게 달라진 것이다. 복돌은 산정(山頂)의 자연 속에서 인정(人情)을 나누며 순박하게 살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여인은 우주(宇宙)같은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거친 꿈을 이루며 살아가길 원했다. 이들 두 남녀의 생존방식은 극과 극으로 나눠질 수밖에 없는 극간(隙間)의 사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물론 환경(環境)은 무시될 수 없었다.

그 동안 둘의 사이는 고산준령이 품어주는 환경의 조화로 연분(緣分)을 키워올 수 있었다. 환경은 인간의 성품(性品)도 생활양식(生活樣式)도 아니 사랑까지도 하나로 묶어주는 대단한 위력(威力)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두 남녀의 마음은 가깝게 엮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광활한 바깥 세상을 모르던 시절에서나 통하는 일이었고, 이제 둘의 미래(未來)는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사랑은 상상의 시선으로 험산의 척박함을 아름답게 덮어주지만, 현실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높은 산벽(山壁)이 그대로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러나 둘의 가슴 속 심처(深處)에는 여전히 사랑의 기운(氣運)이 살아있었고, 그들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 연선(戀線)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김삼천 대방의 함흥상단에는 급하게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상권(商圈)과 물목(物目)을 주도하고 있는 행수(行首)들의 관장업무가 변경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옥례의 역할과 관계가 있었다. 옥례는 특별한 인물로써 함흥상단의 주인인 대방어른에게 중용(重用)되고 있었다. 대신 그녀에게는 혹독한 수련과정이 뒤따랐다. 도방(都房) 최태락(崔泰洛)은 대방의 분신 같은 인물로, 대방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위인이었다. 그는 옥례에게 상인의 기질과 흥정요령, 그리고 상품의 특장을 단기간에 지도하면서 엄격한 지옥훈련으로 가차없이 몰아갔다. 옥례를 어떤 장판에 내놔도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튼튼한 여성 상인으로 키워야 한다는 대방의 지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래에는 상품을 구매(購買)하려는 상대 상인이 있고, 그 구매자를 포섭하려는 또 다른 경쟁자가 있게 마련이다. 삼자(三者)간에는 끈질긴 수(數) 싸움과 말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상거래 경쟁에서 이겨야만 장사판의 단(壇) 위에 올라서는 승리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패배한 상인은 장사판에서 밀려나 변방을 헤매는 초라한 낙오자로 전락(轉落)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 상인세상의 질서인 것이다. 옥례 역시 시장 상인들과의 거래에서 밀려나면 상단에서 여지없이 쫓겨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치열한 상담(商談)과 흥정의 싸움에서 승리자가 되려면 강인한 정신력(精神力)과 체력(體力)이 밑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도방 최태락이 옥례에게 행하고 있는 지옥훈련은 당연한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