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상단 대방(大房)어른의 환대를 뒤로하고 숙소로 돌아온 옥례는 벅찬 환희와 함께 무거운 번민에 빠져든다. 함흥상단의 일원이 되어 정식 상인으로 입적해도 좋다는 대방어른의 허락이 있었고, 현재의 약제거래 외에 함경도 큰 시장 중의 하나인 경성(鏡城)지역 시장의 거래를 책임지고 맡아보라는 언명도 있었다. 대방어른은 이런 내용을 상단을 총괄하고 있는 도방(都房)을 불러 직접 지시하고, 옥례를 빠른 시간 안에 상단의 정식 상인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수련을 시키라는 하교까지 내려주었다.
옥례에게는 파격적인 혜택이 아닐 수 없었다. 야무지게 나름의 기질을 발휘해 시장상권을 이끌어 나간다면,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중견상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여망(輿望)의 길이 그녀 앞에 훤하게 열린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넘쳐 흘렀다.
사실 장사꾼 집단이라는 게 여느 양민들의 집단과 크게 달라, 냉혹하고 패악(悖惡)하기가 이를 데 없고, 자기들끼리 엉켜 붙어 격렬하게 각축을 벌여야 하는 아수라장(阿修羅場) 같은 곳임이 분명하다. 그들이 생업으로 삼고 있는 상업이라는 것은, 서로 힘을 합쳐 결실을 취하고 이를 공평하게 나누는 농가의 훈훈한 모습과 달리, 흡사 먹을 것을 놓고 서로 물고 뜯는 맹수들의 생태계와 유사하여, 그곳에는 인정(人情)도 순리(順理)도 찾아볼 수 없는, 오로지 이득(利得)만을 독차지하려는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난무하는 싸움판 같은 곳이고, 이긴 자만이 거들먹거리며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부덕(不德)한 무리들의 세상인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머지않아 큰 재물(財物)을 손에 틀어쥐고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는 허망(虛妄)한 꿈을 좇아 막무가내로 돌진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의 삶이 궁핍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요원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의 일상이라는 것도 단물을 찾아 머나먼 장사 길을 끊임없이 헤매며 돌고 돌아야 하는 유랑생활이다 보니, 육체는 육체대로 지쳐 급속히 쇠락해질 수밖에 없고, 정신 또한 메마르고 거칠어져 피폐해질 수밖에 없는 견디기 어려운 행로를 습관적으로 감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상인들을 곤경에 빠트리는 것은 그것뿐이 아니다. 그들은 누구나 관청에서 발행하는 행장(行狀)을 발급받아야만 장사를 할 수 있는 형편이다 보니 상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신분은 관청에 속박될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뇌물에 혈안이 되어 있는 관리들의 먹이감이 되어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며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는 가여운 인생들인 것이다.
따라서 장사판에서 안정적인 상인으로 성공하려면 관청의 고위관리나 상단(商團)의 대방(大房) 같은 뒷배경이 없이는 상인의 길을 평탄하게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이 바닥의 정설인 것이다. 바로 옥례가 김삼천 대방의 배려로 바늘구멍 같은 어려운 난관을 뚫고 상인으로써 우뚝 설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게 된 것이다.
옥례가 좋은 기회를 꿰차기는 했지만 그러나 뒤따르는 문제 또한 심각했다.
장사의 셈법이라는 게 언제나 그렇듯이, 대방으로부터 그와 같은 기회를 부여받은 뒤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代價)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장사의 대가(大家)인 대방이 아무런 조건 없이 옥례에게 그런 기회를 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옥례에게는 은혜에 대한 대가로 대방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대방이 하라는 대로 요구를 받아들여 이를 성실히 이행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대방이 옥례를 함흥상단의 일원으로 영입하여 정식상인으로 키우려는 데에는, 당연히 아름답고 농염한 그녀를 상단의 여인으로 끌어들여 중요한 역할을 맡기려는 데 의도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운영하는 함흥상단이 함경도 땅에서는 따로 견줄 자가 없을 정도로 비대해 졌지만, 김삼천 대방의 욕망은 전국적 규모의 거대한 상단을 건설해보겠다는 꿈을 지니고 있었고, 특히 압록강 변 의주만(義州灣)으로 진출하여 중국을 오가며 국경무역을 펼치고 싶은 것이 그의 마지막 소망이었다.
그런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장사에 통달한 뛰어난 상재(商才)들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옥례 같은 매력 넘치는 여류상인을 자신의 휘하에 끌어들인다면, 향후 상단을 부흥시키는데 보물 같은 핵심인물로서 충분히 활용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삼천 대방 자신이 그러하 듯, 모든 남성들의 욕망을 지배하는 정점에는 반드시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여인의 환상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시한 것이다. 많은 남성들의 가슴 언저리에는 여인과 엮어지고 싶어하는 순정 어린 감성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조선 천지에 옥례 같은 아름다운 여류상인이 그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아마도 앞으로 자신의 사업 영역을 확장하는데 옥례의 역할은 한도 끝도 없을 것이라고 김삼천 대방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업가적 후각의 발로일 것이다.
옥례의 생각도 현실적이었다.
소소한 약제장사를 뛰어넘어 큰 상인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김삼천 대방 같은 유력자의 힘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고, 대방의 뒷받침을 받으려면 당연히 그의 어떤 요구에도 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옥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유력자의 여인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그녀에게는 분명히 서 있었던 것이다. 일개 오지마을의 산(山) 처녀에 불과한 자신의 몸뚱이를 던져, 기세 있게 한세상 어우러져 살아볼 수 있다면 자신의 하찮은 이 한 몸이 무에 그리 대단하랴 하는 생각을 진작부터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옥례의 마음에 번뇌를 일으키게 하는 것은 엄니의 질책이나 눈골 마을사람들의 실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나깨나 변함없이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복돌의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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