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끝없는 여정"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23

추동 2020. 11. 16. 09:15

 

함경도와 강원도의 약방을 정기적으로 순방하기 위해, 옥례(玉禮)는 주로 함흥(咸興)에 머물기로 했다. 함흥이 지역적으로 북쪽 회령(會寧)과 남쪽 원산(元山)의 중간지점쯤 되기 때문에, 언제든 다른 객주의 부름을 받거나 물건을 급송해야 하는 경우 오르내리기가 편리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함흥객주의 거래규모가 회령의 이가객주(李家客主)나 원산의 권가객주(權家客主)에 비해 월등하게 클 뿐만  아니라, 함흥객주 김삼천(金參千)이 두만강 변의 국경무역(國境貿易)을 관장하는 함흥상단(咸興商團)의   대방(大房–상단의 주인)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령(會寧)과 경원(慶源)에는 여진부족(女眞部族)과의 공무역(公貿易)과 사무역(私貿易)을 관장하는 무역소(貿易所)가 설치되어 국경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생활용품(生活用品)을 여진으로 수출했고, 여진의 목축용품(牧畜用品)이 조선으로 수입되고 있었는데, 이런 국경무역의 상권을 바로 김삼천 대방의 함흥상단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함경도 10여개 대도시에서 열리는 큰 시장에서도 농수산물과 수공업품, 귀금속품 등 함흥상단의 주력품목이 장마당을 석권하며 큰 돈을 벌고 있었다.

특히 상인들은 함경도 관찰사(觀察使)가 발급하는 행장(行狀–영업허가증)을 지녀야 장사를 할 수 있었는데, 행장발급을 함흥상단이 대행하고 있어 함경도 땅의 모든 상인들은 사실상 김삼천 대방의 영향 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함경도 땅에서 김삼천 대방은 자타가 추앙하는 거상(巨商)이었다.

 

장사의 대가인 김삼천(金參千) 대방은 중년을 넘긴 나이에 여느 상인과 다르게 인간적이고 인자한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옥례는 앞으로 대방어른을 ‘장사의 도(道)’를 배울 스승으로 모셔야겠다는 뜻을 품고 기회를 찾고 있었다. 옥례로서는 그에게 가까이 접근하여 지금의 위탁 객상(客商–타지에서 온 상인)에 불과한 초라한 약제장사를 뛰어넘어 여러 물목을 취급하는 큰 상인(商人)으로 도약해보겠다는 포부를 내심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숙소는 김삼천 대방어른의 지시로 함흥상단 거역(居域)의 한적한 곳에 마련된 여각(旅閣)이었고, 여각 한편에는 작은 창고도 딸려 있어 장사하기에 여러모로 편리했다. 물론 그곳에 마련된 옥례의 숙소는 약제 물량을 원활히 공급한다는 거래계약에 따라 제공되는 것이지만, 옥례의 거처가 이런 호조건으로 마련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김삼천 대방이 옥례에게 베푼 각별한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

 

옥례는 이곳에 상주한 채 회령과 원산을 오가며 장사에 전념할 수 있었고, 복돌은 달구지를 끌며 약제를 나르느라 쉴 새 없이 땀을 흘려야 했다. 물론 창분과 이형석 역시 공급물량을 납품시기에 맞추느라 시간에 쫓겨가며 가공과 조제작업에 몰두해야만 했다.

 

함흥객주가 베푸는 연회가 객주 집 안가에서 벌어졌다.

 

그곳에는 김삼천 대방어른과 상단의 도방, 행수(行首)들, 그리고 상단과 객주집의 식구들 대부분이 참석했고, 옥례와 복돌은 물론 함흥객주를 통해 장사를 하고 있는 보부상(褓負商) 등 객상(客商)과 행상(行商)들이 모두 모였다. 함흥 객주 김삼천 대방은 두어 달에 한 번씩 이런 연회를 베풀어 휘하의 상인들을 격려하며 사기를 북돋우고 있었다. 옥례는 대방어른과 가까운 앞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연회에 참석한 유일한 여류 상인이었다. 웬만한 남성들에 비해 키가 훤칠한 대다 소녀의 청순함 같은 것은 이미 찾아볼 수 없는, 이제는 농익은 과육처럼 풍만한 여인으로 변해 있는 옥례는, 연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 하는 불편한 즐거움을 겪어야 했다. 다만 대방어른이 함께 자리하고 있어, 참석한 뭇 사내들은 옥례를 정시하지 못하고 안보는 듯 보는 듯 사시적(斜視的)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고, 대방어른도 이런 점을 의식했던지 전혀 옥례를 도외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어쨌던 옥례는 아름다움을 넘어 남성의 이성적 끈기를 흩트리는 치명적인 매력으로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런 옥례의 모습을 대청 구석자리에 앉아 있는 복돌이 사뭇 불안한 눈초리를 보내며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연회가 끝난 후 옥례는 대방어른의 조용한 부름을 받고 그 댁 종비(從婢)의 안내로 널찍한 사랑채로 들어선다. 대방어른은 아랫목 고동색 보료에 앉아 옥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대방(大房)어른 밑에는 대방을    보좌하며 상단을 총괄하는 도방(都房)이 있고, 그 밑에 물목(物目) 별로 현장 상거래를 관장하는 행수(行首)들이 있는데, 옥례가 물품을 납품하고 대금을 받기 위해 상대하는 사람은 주로 행수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대방어른을 개별적으로 대면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어서 오너라. 예 앞에 앉아 차나 한잔 하자꾸나.”

 

“공사로 다망하신 대방어른께서 이렇게 소녀를 불러주시니 큰 광영입니다.”

 

잠시 후 어린 종비(從婢)가 다반(茶盤)에 다기(茶器)와 차를 담아 들고 들어왔다.

찻잔을 옥례 앞으로 밀어 놓은 대방어른은 차를 마시라는 듯 눈짓을 하며 말문을 연다.

 

“그래~~, 함흥에서 지내기가 불편하진 않더냐? 약방에도 열심히 순방한다고 들었는데, 무슨 어려운 점이 있으면 예기를 해보거라. 아무래도 객지 생활이니 매사에 편할 리가 없을 테지만––, 어떤 게 가장 불편한 일인지 내가 도울 것이니 어서 예기해 보거라.”

 

대방이 그윽한 눈길을 옥례에게 보내며 따뜻하게 말을 건넨다.

 

“아닙니다. 별로 불편한 건 없습니다. 마련해주신 여각(旅閣)이 산정(山庭)을 끼고 있어 아주 조용하고 지내기가 편안합니다. 모든 것이 대방어른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로 알고 그저 장사에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오––, 그래! 숙소가 맘에 든다니 다행한 일이로구나. 음~~, 그래도 뭔가 너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데, 원하는 게 있으면 이 기회에 예기를 해보거라.”

 

대방어른은 뭐라도 해주고 싶은 심사인 듯 옥례에게 미소를 띠며 재촉의 눈길을 보낸다.

 

“그리 말씀하시니, 외람되오나 한가지 청을 드리겠습니다. 소녀도 대방어른 밑에서 상인으로 대성하고 싶습니다. 대방어른께서 소녀를 어여삐 여기시어 이끌어 주신다면 혼신을 다해 대방어른을 받들며 상인의 길을 배우고 싶습니다.”

 

옥례의 말을 들은 대방의 눈길이 갑자기 열기(熱氣)를 띄며 옥례의 얼굴에 시선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