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끝없는 여정"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21

추동 2020. 11. 2. 07:20

옥례는 벽지산간에서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까?

 

그러나 창분의 시름은 길지 않았다.

 

개마고원의 삶에 대해 그녀에게 후회는 없었다. 아니, 한(恨)도 많았지만, 흥(興)도 있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인연으로 이곳 고산준령까지 밀려들어오긴 했지만, 새 찬 웅풍(雄風)과 매서운 혹한(酷寒)을 몸에 익히며 나름 맹렬히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생애 두 번째의 선택이 창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선택은 그녀의 것이 아닌, 딸아이 옥례를 위한 선택이어야 했다.

 

파고(波高)에 휩쓸린 편주(片舟) 신세였던 여인네, 창분––!

그녀의 몸에 잉태된 업보로, 준령험산의 산 처녀가 되어버린 딸아이 옥례––,

그리고 이 다음 옥례가 낳을 자녀와 이를 이을 후예들––.

그들을 산짐승들이나 노니는 개마고원의 토박이로 살게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무엇보다 옥례에게, ‘어미가 걸었던 행로를 그대로 밟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딸아이는 개마고원과는 다른 세상에서 자신에게 내려진 은복(恩福)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기회를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것이 어미로서 자신이 짊어질 마지막 멍에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길을 열어주어 저 좋을 대로 살다 보면, 잘될 수도 못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자신의 숙명이 아니겠는가! 혹여 혼탁한 장사판에서 일어날지 모를 광기 어린 사건들, ~~장사꾼들의 간교한 유혹과 감언이설을 여하히 이겨내느냐 하는 것 역시, 옥례가 견뎌야 할 몫이 아닌가! 팔자라는 것––, 운명이라는 것––, 그것들은 본시 하늘이 본인에게 내려주는 계시이기 때문이다.

창분은, 개마고원 산간벽지에서 옥례를 해방시켜 주기로 마음먹는다.

 

이형석의 제안을 받고 생각할 말미를 얻은 창분은, 산으로 올라오자마자 자리를 펴고 누운 채, 천장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이 궁리 저 궁리로 꼬박 밤을 지새운다.

이형석의 뜻을 따르자니 고명 딸을 계략과 유혹이 난무하는 험지에 내놓는 것 같아 내켜지지 않았고, 거절하자니 일생일대의 큰 기회를 버리는 것 같아 심히 망설여진 것이다. 희끄무레하게 새벽녘이 밝아오자 옆에서 곤하게 숨소리를 내고 있는 딸아이의 윤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비 없이 잘 자라주어 이제는 성년(成年)의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옥례를 바라보며, 조금씩 거리가 멀어져 갈 날도 이제는 머지 않았구나 하는 느낌이 뻐근하게 가슴으로 몰려온다.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 창분은 눈골마을 신목(神木)인 가문비나무 아래로 올라간다.

마을사람들은 이 가문비나무가 마을을 수호해주는 것은 물론, 모든 호오(好惡)의 사연들을 무탈하게 결정해주는 영신(靈神)으로 믿고 섬긴다. 신목 아래 평평하게 다져진 재단 앞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은 창분은, 앞으로 실행에 옮기고자 하는 결심을 일일이 되새기며 영신(靈神)의 허락을 간절히 청원한다. 그리고 새로운 행로를 걷게 될 딸아이 옥례(玉禮)에게 각별한 가호가 내려지기를 간구한다.

 

창분은 아침상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온 옥례에게 한참 동안 말없이 눈길을 보낸다.

엄니의 거동을 이상하게 여긴 옥례는

 

“엄니––! 아침은 안 드시고 왜 그러고 있어요? 어제 약재상 아저씨 하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옥례야~~! 너 엄니를 떠나서 혼자 살 수 있겠니? 산 속 생활이 많이 힘들지?”

 

“엄니∙∙∙∙, 뭔 말이에요. 나야 언제든 산을 떠나는 게 소원인 걸 엄니가 잘 알고 있잖아요? 엄니하고 헤어지는 것은 섭섭한 일이지만∙∙∙∙. 그러나 산속생활, 너무도 지겨워요. 춥기도 하고, 고되기도 하고, 희망도 없고––.”

 

옥례의 생각은 어서 이곳을 떠났으면 하는 생각을 진작부터 품고 있었고, 엄니인 창분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이형석 아저씨와 엄니 사이에 있었던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옥례는 엄니의 눈치를 보는 듯 머뭇거리고는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드디어 산골생활에서 벗어나게 되는구나’ 하며 잔뜩 기대에 부푼다. 창분으로서는 딸아이의 진심이 하루라도 빨리 산 속을 떠나 평지에서 살고 싶어 하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 샘이다.

 

“엄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엄니를 아주 떠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장사라는 게 약재 팔아 이문 남기자고 하는 건데, 대순가요? 잘할 수 있어요. 그 일이 내게는 맞는 일이고, 하고 싶었던 일이에요.”

 

사뭇 반겨 하는 딸아이의 표정을 살피며,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한마디 덧붙인다.

 

“네가 상대해야 할 회령(會寧)과 함흥(咸興) 그리고 원산(元山)의 객주들은 갖은 유혹으로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거래조건을 미끼로 대들거나 아니면 돈으로 너를 매수하려 할 텐데∙∙∙∙, 네가 그들을 이겨낼 수 있을는지 모르겠구나!”

 

“그거라면 더더욱 걱정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내가 그들을 휘어잡을 거니까요. 장사만 잘하면 되는 것 아니에요? 복돌 오라버니나 덕현 오라버니도 있으니 안심해도 될 거예요.”

 

창분은 부리나케 순옥을 불러 이런 사실을 의논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