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재 장사도 이제는 더 이상 해먹기가 어려울 듯싶어요.”
이형석은 무슨 요량이라도 숨겨 놓은 듯, 우선 엄살부터 늘어놓는다.
“한동안 함경도 땅에서는 웬만하면 우리 약재를 쓰지 않은 약방이 별로 없었는데, 이제는 다 옛날 예기가 될 판이네요. 요즘 전란 후유증으로 외상(外傷)환자 내상(內傷)환자 할 것 없이 병자가 크게 늘어나고 있어, 약국과 약재상이 제철을 만난 듯 한참 성황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데 뭐가 문제란 건가요? 약재상이 성업을 이루면 이씨 어른에게도 좋은 일 아닌가요?”
그는 현실을 이해 못하는 창분네가 답답하게만 느껴졌던지 목소리에 힘이 빠진다.
“글쎄, 그렇게만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어요∙∙∙∙. 약재상이 제법 장사가 된다 싶으니까 여기저기 약재가게가 난립하고 있는데 다가, 거기에 딸린 약초꾼 또한 수도 없이 늘어나고 있으니 당연히 경합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 문제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어요. 큰 도시에서 지역 상권을 쥐락펴락하는 객주(客主)들의 횡포가 더 큰 문제예요. 약재 같은 건 눈길도 보내지 않던 객주들이 최근 환자가 늘면서 약재장사가 제법 이문이 넉넉하다고 알려지면서 수하에 내거간(內居間–객주에 속한 판매원)을 십 수 명씩 거느리면서 약방이란 약방은 모조리 상품과 돈으로 사로잡고 있으니~~. 우리 같은 규모가 작은 약재상은 기를 펴고 장사하기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거지요. 결국 튼실한 약방들은 모두 객주들 차지가 되고 말았으니, 이젠 제대로 된 약방을 찾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나 마찬가지지요. 장사를 계속하려면 천상 객주를 찾아가 매달리는 수밖에 없는데, 객주와 손을 잡는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산 넘어 산이라 할까~~, 참 답답할 뿐이에요.”
큰 도시에는 곡물을 중심으로 생산자나 상인으로부터 상품을 위탁 받아 팔아주거나 알선해주는 중간상인 격인 객주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들은 먼 거리에서 오는 상인들을 위해 화물을 운반해주기도 하고, 또 물량이 넘치면 자신의 창고에 보관도 해주고 있다. 때로는 상인들에게 필요한 물품대금을 미리 융통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잠자리와 먹을 거리를 마련해주는 등 편의를 제공하기도 한다. 상품을 싣고 여상(旅商–여러 지역을 순회하는 행상)을 하는 상인들에게 객주는 없어서는 안될 고마운 존재지만, 그러나 그들의 편의제공은 공짜로 해주는 것이 아니라, 고액의 구전(口錢)을 챙기기 때문에 그들에게 잘못 휘말렸다 가는 장사 이문은커녕 본전까지도 몽땅 털리고 마는, 그야말로 악덕상인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바로 객주의 본색(本色)인 것이다. 그들은 막대한 자금으로 일상용품을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관청과 결탁하여 사실상 지역상권을 휘어잡고 있는 배경이 탄탄한 대상(大商)들이다. 어찌 보면 큰 도시의 상권은 이들 객주들에 의해 형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의 위세는 막강하다 아니할 수 없다. 혹여 잘 팔릴만하다고 판단되는 특수한 물건이라도 나타나면 불문곡직하고 달려들어 매점매석(買占賣惜)을 하는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품을 독식하며 폭리를 취하는 사람들이 바로 객주들인 것이다.
이형석의 제안은 쉽게 거절할 수도 그렇다고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는, 큰 모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거운 일이었다. 그의 뜻은 한마디로 약제장사를 자신과 창분네가 동업으로 함께 이끌어가자는 것이다. 아니, 창분네와 이형석은 물론 양쪽 집의 자녀들까지도 모두 동원하자는 이야기다. 그의 말인즉슨, 약제 원료인 약재(藥材–약초나 열매 혹은 버섯류 등 산물) 물량은 창분이 책임지고 확보할 것이고, 이런 약재를 약품(藥品–약제)으로 조제하거나 가공하는 일은 이형석 자신이 맡아서 처리하며, 이렇게 조제된 약품판매는 창분의 딸 옥례(玉禮)와 순옥의 아들 복돌(福乭), 그리고 이형석의 아들 덕현(德鉉)에게 맡겨 젊은이들의 기세로 판매를 이끌어가게 하자는 내용이었다. 특히 판매경로는 두 갈래로 나누어, 큰 도시는 객주(客主)에게 약제(藥劑–약품)를 공급하여 위탁판매를 하자는 것이고, 나머지 군소지방은 지금처럼 여상을 통해 직접 장사를 하자는 제안이었는데, 객주를 상대로 하는 영업은 아무래도 붙임성이 뛰어나고 활달한 성격에 수치에도 밝은 옥례에게 맡기되 복돌을 옥례의 동행자 겸 보호자로 붙여주고, 약방을 상대로 하는 여상(旅商) 영업은 덕현에게 맡기자는 것이다. 물론 발생하는 이문(利文)은 창분네와 이형석이 반분(半分)하자는 조건이었다.
이런 이형석의 제안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큰 변화가 있었다.
그 하나는, 약초 등 약재 산물의 물량이 지금보다는 수십 배 이상으로 늘어나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동안 원초(原草)의 약재 산물을 가공 없이 약방에 팔아왔는데, 앞으로는 아예 이형석이 의원이 되어 여러 질병의 증세에 맞춰 표준약품으로 직접 가공하여 약방에 공급함으로써, 약방의원들이 쉽게 약을 조제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거리가 멀고 큰 도시인 경우 그 지역 상권을 쥐고 있는 객주들을 포섭하여 가공된 약제를 공급하여 대량판매를 실현해보자는 것으로, 결국 객주를 통한 위탁판매와 여상 판매를 펼쳐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까지 영업규모를 확장함으로써 지금의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삼아보자는 고심 끝에 나온 처방이었다.
이형석이 파악한 바로는, 회령(會寧)과 함흥(咸興) 그리고 원산(元山)에 약방을 상대로 하는 제법 규모가 큰 객주가 활기를 띄고 있고, 이들과는 어느 정도 안면도 익혀 놓은 상태라 조금 더 애를 쓰면 그곳 객주에게 판매를 위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성사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적인 이야기도 곁들였다.
이형석의 주된 제안은 지금까지의 여상(旅商)보다는 위탁판매(委託販賣)에 중점을 두어 판매규모를 확대해 보자는 제안이라 할 수 있고, 특히 자신들의 젊은 자녀들에게 장사의 기회를 부여해 큰 상인(商人)으로 키워보자는 의도도 함께 깔려 있었다.
머리 속이 복잡해지면서 두통(頭痛)이 몰려오는 것을 어렵사리 견디고 있는 창분은,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현재의 눈골에 주저 앉아서 허우적거릴 것인가’ 를 놓고 퍽이나 힘든 시름에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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