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끝없는 여정"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28

추동 2020. 12. 21. 11:41

 

10월 초순을 조금 넘긴 가을 초엽인데도, 경성에는 밤새 눈이 내려 설원을 이루고 있었다. 이 지역은 서쪽 준령에서 몰아치는 골바람(岳風)과 동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갯바람(潮風)이 서로 부딪치면서 발생하는 기압골 탓인지, 여느 지역과 달리 일찍 눈이 내린다. 눈은 한번 내렸다 하면 며칠이고 계속되어, 산하가 온통 눈으로 뒤덮이면서 길이 막히고 사람들의 내왕 또한 끊어져 천지가 온통 적막강산을 이룬다. 더욱이 타지를 넘나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눈이 덮여, 산길인지 산등성이인지 구분이 어려울 지경이다.

 

그런데 갑자기 김삼천(金三千) 대방이 설경(雪徑–눈길)을 헤쳐, 경성으로 넘어온다는 전갈이 왔다. 용무가 있는 경우 대방은 지역 행수들을 함흥상단으로 불러 일을 처리하는 게 상례인데, 이번에는 원행(遠行)이 어려운 대도 눈길을 뚫고 경성으로 행차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옥례에게 유시(酉時–6시경)에 경성도호부(鏡城都護府) 향청(鄕廳)에서 기다리라는 분부가 첨부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도호부 부사(府使) 영감의 호출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최근 수산물의 가격경쟁으로 경성객주(鏡城客主) 측과 큰 다툼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들이 도호부에 악의적으로 탄원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부사 영감의 호된 질책이 내려질 것으로 예상되어 옥례 역시 바짝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옥례는 알 수가 없었다.

 

향청 관원에게 은밀히 수소문을 해보니 경성객주(鏡城客主) 이정홍(李貞洪)과 회령객주(會寧客主) 이원홍(李元洪)이 사흘 전쯤 경성도호부 정인채(鄭仁彩) 부사를 면담하고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들 이원홍과 이정홍은 사촌 형제간이다. 경성객주 이정홍은 어떤 적수도 없이 승승장구하며 자신의 고향인 경성(鏡城) 장(場)마당의 상권을 모조리 휩쓸고 있었는데, 어느 날 외지에서 굴러들어온 불명(不名)의 여류상인에게 쫓기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경성객주가 2류 상인으로 추락하며 위기를 맞고 있었다. 또한 회령객주 이원홍 역시 두만강 변 회령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국경무역을 착실히 운영해왔는데, 뒤늦게 뛰어든 함흥상단의 위력에 밀려, 지금은 고사 직전에 빠져 암울한 상태에 봉착해 있는 실정이다. 이들 형제는 이를 갈며 함흥상단의 김삼천을 어떻게든 거꾸러트리고 옛 전성기를 되찾아야 하겠다는 욕망에 불타고 있었고, 특히 함흥상단의 여류행수 장옥례(張玉禮)를 제거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업체 간에 물량과 가격 때문에 자주 분쟁을 일으키는 대표적 물목은 함경도가 주산지인 명태(明太)를 들 수 있다. 함경도 앞바다에서 주로 잡히는 명태(明太)는 그 이름의 어원이 경성과 인접한 명천(明川)에서 처음 시작되었을 정도로 함경도와 인연이 깊은 어물이다. 이곳에서 어획한 명태는 한양의 왕실을 비롯하여 전국 8도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대신 곡식이 부족한 함경도 도민들의 식량으로 되돌아오고 있어 함경도에서는 효자물목(孝子物目)으로 귀하게 취급되고 있었다. 한반도 북단 변방 오지인 함경도는 대부분 험준한 산악지대인지라 농사지을 전답(田畓)이 귀할 뿐 아니라, 기후마저 변화무쌍하여 제대로 농사짓기가 어려웠고, 따라서 도민이 먹을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상습적으로 기근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다행히 남쪽지방에서 명태와 명태 알(明卵)이 맛있는 국거리나 무침거리 찬반으로 인기를 끌면서, 함경도 주변 곳곳에서 명태와 곡식의 물물교환 상거래가 성행했고, 심지어 남쪽의 상인들은 미곡(米穀)을 우마차에 가득 싣고 함경도로 들어와 명태와 교환하는 일도 성황을 이룰 정도였다. 나중에는 조정대신과 관리들에게 지급되는 녹봉(祿俸)에 쌀과 함께 명태가 필수 품목으로 포함될 정도로 명태의 효용은 식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품목으로 부상되고 있었다.

 

함경도 감영(監營)을 비롯한 도내 행정관청들은 도민들의 기근 해결책으로, 함경도 특산물인 명태를 백성들의 식량을 해결할 대체품목으로 정하고 특별관리를 하고 있었다.       함경도 감영에서는 어민이 잡아 올리는 명태 어획고(漁獲高)의 일정분량을 세금 명목으로 징발하여 이를 타도(他道)의 곡물과 교환한 후, 생계가 어려운 도민들에게 구휼미(救恤米)로 배급해주고 있었다. 따라서 관아(官衙)에서는 상단(商團)이나 상인들이 물량을 매점매석(買占賣惜)하거나 독과점(獨寡占) 혹은 난매(亂賣)를 할 경우 행장(行狀–영업허가증)을 박탈하는 등 엄격한 처벌이 가해지고 있었다.

 

경성의 수산물은 주로 경성만(鏡城灣)에 위치한 하온포구(下溫浦口)나 어랑포구(漁郞浦口), 또는 명천항(明川港)에서 조달하여 수산물시장으로 공급되고 있었다. 그러나 기상상태나 어로 작황에 따라 어물(魚物)의 물량과 크기, 가격 등이 들쭉날쭉하여 상단과 객주 그리고 시장 상인간에 물량확보와 가격경쟁 등으로 치열한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경성만에는 3백여 호의 어민(漁民)들이 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그 중에 1백여 호는 선주(船主)에게 어선을 빌려 동해 먼바다로 나가 풍족한 어군(魚群)을 쫓아 어로작업을 벌일 수 있었고, 그렇게 어획한 물량은 보합제(步合制)에 의해 선주와 일정비율로 나누어 분배를 받았는데, 이들 어민들은 제법 여유로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어민들은 바닷가의 바위나 해안에 붙어 그물질을 하거나 낚시를 해서 겨우겨우 먹고 사는 영세어가(零細漁家)들이기 때문에, 끼니도 때우지 못하는 어려운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같은 실정에 착안한 옥례는, 생계가 어려운 어민 50여 명을 선발하여, 미리 조차(租借)한 5~6명이 승선할 수 있는 어선 10여척과 자망(刺網–걸 그물)을 이들에게 대여해주어 먼바다에서 어로작업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고 있었다. 이들은 본인이 열심히 하면 높은 소득을 올려 가족을 편히 부양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옥례는 이런 조처를 통해 그들 어민들의 조업의욕을 최고조로 끌어올려 상단이 필요로 하는 신선한 어물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대신, 이를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에 공급하여 수산물시장의 상권을 석권하는 것은 물론, 가난한 어민들에게 선행을 베풀어 함흥상단의 신용도를 크게 높이는 일석이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물론 어로성과(漁撈成果)가 높아짐에 따라 조차한 어선과 자망의 대금도 쉽게 상환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