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끝없는 여정"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29

추동 2020. 12. 28. 07:09

유시(酉時)가 조금 못 미쳐 대방어른이 설경(雪徑)을 뚫고 경성도호부에 당도했다.

옥례는 도호부사(都護府使) 정인채(鄭仁彩) 영감의 호출이 어인 연유인지, 예상되는 정황들을 대방에게 상세히 설명하고, 부사(府使) 영감이 한쪽의 일방적 이야기만 듣고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자신의 의향을 전했다.

 

향청 좌수(座首)의 안내를 받아 관아 중앙에 위치한 동헌(東軒)으로 들어서니,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서책을 읽고 있던 부사 영감이 고개를 들어 대방을 한참이나 쏘아보더니, 서서히 눈길을 돌려 옆에 서있는 여인에게 시선을 멈추고는, 무언가에 홀린 듯 야릇한 표정을 짓는다. 돈 좀 벌었다고 오만 방자해진 함흥상단 김삼천의 기세를 단숨에 꺾어 놓고 말겠다며 벼르고 있었던 자신의 의도가, 한 여인의 자태에 눌려 잠시 흔들렸던 모양이다. 잠시 후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는 일행이 바닥에 놓여 있는 방석을 끌어당겨 자리를 잡자 무거운 목소리로 말문을 연다.

 

“김 대방! 당신이 그런 사람일 줄은 내가 미쳐 몰랐었어––. 함흥상단이 나라의 위민시책(爲民施策)을 멋대로 무시해도 괜찮은 것인가? 이제는 부호가 되었다고 기고만장해도 된단 말인가! 장사치들이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이문(利文)만 남으면 나라까지 팔아먹는다더니, 도대체 김 대방은 상단 이익만 중하고 나라의 사정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인가? 김 대방이 아무래도 상단운영을 끝내고 싶어 작정을 한 모양이 아닌가!”

 

부사 영감이 한참 노기를 띠며 대방에게 질책을 퍼붓는다.

당황한 대방이 자세를 낮추며 도호부사에게 억울한 이야기라는 듯 항변을 한다.

 

“부사 영감! 어찌 그런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요? 저희 함흥상단은 단 한 번도 나라가 하는 일을 거슬러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장사꾼이라 하지만, 언제나 나라 일을 우선해서 생각하고 있는 저에게 그리 말씀하시면 너무도 섭섭하신 말씀입니다. 무언가 부사 영감께서 저희 상단에 대해 크게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오해라고? 그럼, 어찌하여 명태를 대량으로 숨겨놓고 가격 장난을 치고 있단 말인가? 명태 유통을 흩뜨려 놓으면 서민들이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잖은가! 김대방––, 이래도 할 말이 있는 것인가?”

 

“아니––, 저희 상단이 명태를 숨겨놓다니요? 그리고 가격 장난을 치고 있다니요? 부사 영감! 너무도 억울한 말씀이어서 기가 막힐 뿐입니다. 저희가 하고 있는 명태 유통에 대해 소상하게 말씀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이때 옥례가 서둘러 나서며 어렵게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다.

 

“대방어른, 그건 제가 한 일이므로 소녀가 직접 말씀드리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그게 낮겠구나. 그럼 장행수가 직접 부사 영감께 말씀을 올리는 게 좋겠구나.”

 

대방이 흘깃 옥례를 바라보며 설명할 말미를 주자, 부사 영감이 옆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여인에게 눈길을 돌렸다가는, 잠시 남쪽 너른 행랑마당을 향해 시선을 옮기더니 다시 여인에게로 눈길을 보낸다. 여인의 자태가 접하기 어려운 미인인지라 자신도 모르게 눈길이 자꾸 그녀에게 쏠리지만, 체면 때문에 이를 감추느라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이리저리 돌리곤 하는 모양이다. 부사 영감도 완숙한 남자가 아니던가!

 

“네가 그리도 소문이 자자한 여류 행수(行首)인 모양이구나?”

 

“네––, 부사 영감. 처음 뵙겠습니다. 저–, 함흥상단 경성 행수 장옥례라 합니다.”

 

“허허‘~~, 그래? 여인의 몸으로 상단 행수가 되었다니 흔치 않은 일이로구나. 내–, 전에, 네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언제 한번 너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찌하여 장(場)바닥에는 온통 네 예기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더구나.”

 

“아닙니다. 저는 그저 대방어른 지침을 받아 열심히 장사를 했을 뿐입니다. 아무래도 상인 중에 여인은 저 혼자 뿐이라서 잠시 눈에 띄었을 것입니다.”

 

“장사든 뭐든 열심히 한다는 건 좋은 일이다만, 문제는 명태가 함경도 도민들을 먹여 살리는 중요한 물목인데, 함흥상단은 어찌 대의를 저버리고 돈벌이에만 급급하고 있는 것이냐? 그 물건이 우리 지역 주민들의 식량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냐? 아니면 대방이 시켜서 그런 것이냐?”

 

“부사 영감께서 크게 오해를 하고 계시는데, 허락하신다면 저희가 하고 있는 명태의 유통과정을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네가 하고 있는 명태 유통이 어떻다는 것인지 한번 설명을 해보거라.”

 

옥례는 우선 경성만(鏡城灣)에 연하여 살고 있는 영세어민(零細漁民)들의 어려운 생활실태를 부사 영감께 구구절절이 설명한다.

 

“일부 어민들이 선주에게서 어선을 빌려 고기잡이를 하고 있습니다만, 보합제(步合制)에 묶여 어획량의 절반은 선주가 독식하고, 나머지 물량을 고기를 잡은 7~8명의 선원이 나누다 보니 명태의 가격이 나날이 올라갈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그나마 어선을 빌릴 수 없는 대다수의 어민은 해변에서 잔챙이 어족이나 낚으며 살다 보니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옥례는 이들의 어로 경험을 최대한 살려, 어획량을 늘리려는 자신의 ‘영세어민(零細漁民) 지원책(支援策)’에 대해 부사 영감에게 소상히 설명한다.

50여호가 넘는 어민들에게 어선을 제공하여 그들이 먼바다로 나아가 마음껏 어로작업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있다는 것과, 상단(商團)에서 조차(租借)한 어선과 자망 대금을 변제하기 위해 어획량의 3할을 공제하고, 나머지 7할을 그들에게 직접 지급해 줌으로써 생계에 어려움을 겪던 그들이 이제는 제법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이로 인해 함흥상단은 당일마다 신선한 수산물을 확보하여 다른 객주에 비해 싼 가격으로 시장에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등을 설명했다. 아마도 다른 객주 상인들은 영세어민을 활용할 생각을 못했기에 물량확보와 가격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었고, 영업실적이 떨어지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터무니없는 말로 함흥상단을 모함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그들이야말로 나라의 위민시책을 어그러트리는 장본인들이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설명했다.

 

“하오나 함흥상단은 그저 이문이나 남기기 위해 사람의 도리나 양심을 팔아먹는 그런 장사꾼이 아니라는 것을 부사 영감께서 십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옥례의 분기 넘치는 설명은 도호부사 정인채 영감은 물론, 김삼천 대방과 향청 좌수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극적으로 감복시키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