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악연인가, 가연인가−2
순금의 저항은 점차 힘이 빠져가고, 야욕을 채우려는 사내의 막바지 몸부림이 절정을 이루려는 순간이었다. 맨 살만 남은 저항의 막바지에, 체념에 빠진 순금은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 닿았음을 느낀다. 순간 갑수와 갑진을 동시에 떠올린다.
∙∙∙∙∙우리 딸 서연을 어이할꼬! 도련님께서 우리 딸을 지켜 주시기나 할는지? 아가야, 어쩌면 좋단 말이냐?∙∙∙∙∙
어차피 나 자신은 버려질 수밖에 없겠구나 각오하며 몸이 찢기는 것을 체념했지만 우리 딸만은 어떻게 든 지켜야 할 텐데 하는 모정이 솟구쳤다. 허나 아무런 묘책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였다.
마침내 내 몸이 왜놈에게 더럽혀지는구나 하는 그 순간, 야수와 같았던 남자의 무거운 몸이 ‘퍽’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여인의 몸 위로 내려앉으며 맹렬했던 움직임이 경직되는 느낌이 들었다.
∙∙∙∙허―, 이 무슨 일인가?∙∙∙∙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치마를 올려 살을 감추면서 일어나던 순금은 또 한 번 “억?” 하며 자지러지게 놀라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만다. 총을 거꾸로 들고 서있는 다른 왜병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소년 왜병이었다. 그가 순금을 겁탈하려던 사내를 개머리판으로 내려쳤기 때문에 위기의 순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쓰러진 왜병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죽었는지 엎어져 미동도 하지 않았고, 소년 왜병은 매우 상기된 채 멀쑥이 서서 반나체가 되어 있는 여인과 어린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안심이라도 시키려는 지 옷을 입으라는 시늉을 한다.
열 예닐곱쯤이나 되었을까? 아직 병사로서는 어색하여 군복 속에 몸이 묻혀 있는 듯 앳되 보이는 소년 왜병은 순금을 쳐다보며
“저는 일본에서 온 다카하시 다로(高橋太郎)라고 합니다. 놀라게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이젠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충격을 받은 따님을 달래 주십시오.”
라고 두 모녀를 안심시키더니 벌떡 일어나 엎어져 있는 왜병을 집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벗겨진 하반신을 바지로 덮은 후, 방문 쪽으로 끌고 가려는 데 몸무게가 어찌나 무거웠던지 땀을 뻘뻘 흘리며 기를 써보지만 소년 병사의 힘만으로는 쉽사리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렇게 소년은 시신을 옮기기 위해 진땀을 흘리고 있고 모녀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한 순간, 소년 왜병은 벌떡 일어나며 동작을 멈추더니 촉각을 곤두세우고 문밖에 귀를 기울인다.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인기척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곧이어 저벅저벅하던 발걸음 소리가 집 앞에 멈춰서는 낌새를 보이더니 무언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말소리를 듣고 왜병임을 알아차린 소년은 재빨리 뒷문으로 빠져나가고, 방안에는 순금 모녀와 죽어 있는 왜병이 함께 남아 있는 형국이 되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을 열어젖히고 들이닥친 여러 명의 왜병들은 방안의 정경을 보고는 크게 경악하며 자기들끼리 빠르게 말을 주고받으며 매우 시끄러워진다. 왜병들 일부는 죽어 있는 시신을 이리저리 들쳐보고, 또 일부는 집 주변을 샅샅이 뒤지더니, 그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살기 띤 눈초리로 여인을 쏘아보며 ‘꿱’하고 소리를 높여
“누가 죽였느냐? 네가 죽인 것이냐? 말을 해봐라. 어서―!”
하며 고함을 질러댄다. 나신이 드러나 있는 여인의 모습과 바지가 벗겨진 병사의 옷차림 등 방안의 여러 정황으로 보아 아무래도 죽은 병사가 여인을 겁탈하려다 누군가에게 가격을 당하면서 살해된 것으로 보이기는 하나, 여인의 짓이라고 믿을만한 구석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오또(남편)는 어디 갔느냐? 행방을 대라!”
넋이 나가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던 순금은 서연을 감싸 앉은 채 마냥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니라는 듯 양 손을 흔들어댄다.
우두머리가 다른 왜병과 한참을 말을 주고받더니 병사들은 시신을 밖으로 끌어내며 운구 준비를 하고, 우두머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여인의 얼굴과 몸매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을 떼지 못한다. 아무래도 여인의 미모에 마음이 동한 나머지 당장 없애 버려야 할지 아니면 살려 두어야 할지 망설이는 듯 보였다.
순금의 운명은 하루 밤사이에 극락과 지옥을 몇 번이나 오고 가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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