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연재

역사소설「사랑의 요소(要素)」- 14

추동 2023. 10. 30. 07:03

 

(2)

출생의 비밀−9

 

옛집으로 되돌아온 후 한동안은 엄니의 흔적과 체취를 찾아 꿈속을 헤매며 엄니의 환영과 함께 지내야 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먹먹하고 뭉글뭉글한 나날을 넋을 놓고 지내다 보니 그것이 지독한 몸살로 이어졌고, 심한 오한과 토악질을 견뎌야 했다. 문득 토악질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정신을 가다듬어 이리저리 손가락 셈을 하다 보니 아니나다를까, 순금의 몸에 이상한 징후가 나타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퍼뜩 뒤돌아보니 어쩐 일인지 순금의 몸에 있어야 할 달거리가 두어 달 째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태기가 있는 것인가? 무심히 지내다 이를 알아차리게 된 순금은 순간 숨이 멎는 듯 온몸이 경직되고 말았다. 망설임 끝에 순금은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고 아랫마을 명이 할멈을 찾아가기로 했다.

“네가 웬일이냐? 별일이라도 있는 게냐?”

명이 할멈이 순금에게 반가운 표시를 한다.

∙∙∙∙할머니~ 저어−−, 어째야 할지 몰라서요~.”

“뭔 일인데 그러냐~, 어디가 아픈 게여-, 이제 보니 얼굴이 반쪽이 다되었구나~, 어서 말해보거라, 뭔 일인지--.”

“저∙∙∙∙∙, 제 몸이, 몸이 좀 이상해요. 할머니∙∙∙∙

순금은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을 방바닥만 들여다보더니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명이 할멈은 대뜸

“흐~ , 아이를 가진 게 틀림없구나. 그런데 아이 아비가 누구여! 혹시 진사 댁 큰 도령 아녀? 맞지?”

“그걸,∙∙∙∙

“에그~! 진사 댁 도령이 맞는 모양이네, 그렇다면 넌 시집가기는 틀려버렸다 야--. 원래 진사 댁 큰 도령이 수탉 마냥 바람기가 심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니 만~. 큰 일이로구나.”

“흐~ ! 할머니 저 어쩌면 좋아요?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에끼! 그런 소릴랑 두 번 다시 하지 말거라. 네가 시방 그런 말 하면 아이에게 큰 죄악이여. 생겼으면 낳는 게 인간의 도리지. 여자의 운명이기도 하고~. 안 그러냐? 태어날 아이가 살고 죽는 것은 제복에 달린 게고--. 어떻게 든 낳아 기를 생각을 해야지. 그렇게 아이가 생겼으면 그것도 큰 복인 게여, 지 아비가 양반 아닌가 벼. 알겠냐?”

 

명이 할멈이 따뜻한 손길로 순금의 복중 아이를 조석으로 돌보는 동안 애 아비인 갑수는 한 번도 얼씬하지 않았지만, 대신 갑진이 틈틈이 찾아와 순금을 위로하며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갑수는 쫓아냈던 부인과 다시 합친 후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으로 올라갔다는 소문이다. 아마도 김 진사 내외가 과거를 핑계 삼아 겸사겸사 갑수를 한양으로 좇아내어, 순금의 곁을 떠나보낸 게 분명했다.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어 사지를 잔뜩 웅크릴 수밖에 없던 어느 엄동설한의 새벽, 순금은 힘겹게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 전적으로 명이 할멈의 노련한 출산 조리 덕분으로 어미도 아이도 별탈 없이 세상을 맞을 수 있었다. 아이는 딸이었고, 그 아이를 보며 가장 기뻐했던 사람은 다른 사람 아닌 갑진 도령이었다. 물론 뒤에는 진사 댁 마님의 의도적 보살핌도 한몫을 했다. 아마도 마님은 이 아이가 자신의 손녀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준 이도 바로 애기 아비의 동생인 갑진 도령이었다. 나름 여러 뜻 글자를 엮어 이름을 조합하던 중 문득 형에게서 글을 배우며 서책 읽기를 좋아하던 순금을 연상하면서, 그 딸 역시 글 쓰고 책 읽으며 기죽지 말고 예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서연(書娟)"이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사실 그 이름은 순금을 향한 갑진의 심정을 절절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꼬마 순금이라고 불릴 만큼 서연은 제 어미의 모습을 어찌나 그리 빼 닮았던지 이목구비가 또렷했고, 특히 투명한 피부와 시린 듯 맑은 눈매는 어떻게 저런 모습을 지닐 수 있을까 감탄할 정도로 예쁘고 새초롬한 대다 도도한 구석까지 풍기는 그런 독특한 생김새였다.

 

서연의 어린 시절은 갑진이 정성껏 쳐준 울타리가 보호막이 되어 한동안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물론 진사 댁 마님의 눈초리는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갑진이 순금 모녀에게 보내는 각별한 태도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누구의 잘못이던 간에 순금 모녀로 인해 진사어른의 체면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고, 집안의 기둥인 큰 아들을 한양으로 좇아내 생이별을 하고 있는 대다, 작은 아들까지 순금에게 빠져드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생에 무슨 악연이 있어 이런 기막힌 사연이 빚어지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순금의 딸 서연은 핏줄은 분명하나 김씨 집안에 들일 수는 없는 핏줄이니 적당히 돌 봐주다 끊어버려야 할 인연이 아니던가?

 

그러나 어머니의 바램과 달리 갑진의 순금에 대한 연민의 정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깊어질 대로 깊어져 가고, 더욱이 예쁜 서연을 형 대신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혈족의식까지 겹쳐져 순금 모녀의 주변을 벗어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