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연재

역사소설「사랑의 요소(要素)」- 12

추동 2023. 10. 16. 09:08

 

(2)

출생의 비밀−7

 

순금이 생전 처음으로 갑진의 순정 어린 고백을 들은 후부터는, 갑수를 대하기가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었다. 갑수는 주인 댁 도령으로서 그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압적인 상대로 느껴졌지만, 갑진은 순금의 여린 마음을 널따랗게 감싸주는 포근함이 느껴져, 주인 댁 도련님이 아닌 서로 마주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상대로 여겨졌다. 틈만 나면 순금을 탐하려는 갑수에게 몸은 점점 익숙해지고 있지만, 그러나 마음은 조금씩 조금씩 멀어져 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갑수에게도 또 자신에게도 서서히 파탄의 징조가 엿보이기 시작했다. 이러다가는 머지않아 감당할 수 없는 사달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감이 엄습해 왔다. 무엇보다 갑진의 애절한 눈망울이 갑수의 탐닉을 멀리하게 했다.

그리고 문득 진사 댁을 떠나야 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갑수의 치근거림이 싫지는 않았고 더러는 갑수의 손길을 기다리는 때도 없지 않았지만, 언젠가 마님의 누에라도 띄는 날이면 어떤 날벼락이 떨어질 지 상상만 해도 끔찍한 노릇이었다.

 

새벽이 밝으려면 아직도 두어 식경은 족히 남은 시각인데, 찜통이라도 달궈 논 듯 엄청스레 더운 날씨 탓에 잠을 뒤척이던 갑진이 소변도 볼 겸 바람도 쏘일 겸 부스스 일어나 방을 나왔다. 새벽인지라 제법 바람이 불면서 한결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훤히 터져 있는 앞마당 쪽을 향해 바람 따라 한발 한발 나가다 보니 아니, 이 밤중에 사랑채에서 아버지 김 진사의 격앙된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네놈이 예가 어디라고 나타난 것이냐! 살인을 저질렀으면 죽은 듯이 숨어서 살 일이지 어째 다시 나타난 것이야~. 네놈이 충분히 먹고 살도록 뒷받침까지 해주지 않았더냐!”

“진사어른~, 이 몸 죽어 마땅한 줄 잘 알고 있습니다요~. 하오나 그날 밤에도 말씀 여쭸듯이~ 저는 진사어른의 심중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 채, 흐흑~, 순금 어미를 제 내자로 삼아 이 집안 살림을 더욱 야무지게 꾸려볼 요량으로 있는 것 없는 것 정성을 다했고요∙∙∙∙, 이미 둘이서 굳게 약조까지 나누었거늘 하루아침에 그리 변심할 줄은 몰랐구먼요-. 한데, 어느 샌 가 진사어른을 모실 생각에 빠진 순금 어미가 이놈을 내려 깔 듯 박대하는 거지 뭐예요, 마치 자기가 안방의 마님이라도 된 양으로--. 순간적으로 배신감이 차올라 충동적으로 밀쳐낸 것이~~, 정말 그리 될 줄은 몰랐구먼요~. 정말로 순금 어미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제가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천벌을 받을 거구먼요~~. 진사어른! 제발 이놈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한번 진사어른을 뫼시면서 개과천선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지요−−.”

노기에 찬 아버지 김 진사가 목소리를 절제하며 호통을 치시는 소리와 오랫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천 서방이 흐느끼면서 읊조리는 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귀를 쫑긋 세운 갑진은 몸을 떨면서 아버지와 천 서방의 예기를 우연히 듣게 된 것이다.

 

냉큼 방안으로 되들어온 갑진은 온통 머리 속이 난마처럼 엉켜지는 것을 느끼며, 아버지와 천 서방의 대화 속에 엉켜 있는 실타래를 풀어 앞뒤 사연을 맞춰보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지금으로부터 5~6년전, 산길 숲 속에서 횡사한 순금 어미의 죽음은 알게 모르게 쉬쉬하며 조용히 덮어져 왔는데, 오늘밤 여러 해 보이지 않던 천 서방이 갑자기 나타나면서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거지반 천 서방의 마누라로 낙인이 찍히다시피 했던 순금 어미를 아버지 김 진사가 갑작스레 끼어들어 가로챈 것이 사건의 발단인 듯했다. 말하자면 순금 어미의 죽음은 진사어른과 천 서방 사이의 애증으로 빚어진 사건이었다. 이러한 곡절이 세상에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김 진사의 체면과 위신은 땅에 떨어질 것이 분명하고, 김 진사 가문이 이곳 충주바닥에서 행세하기는 더 이상 어려웠을 터라, 어쩔 수 없이 쉬쉬하며 천 서방을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타지로 도피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니--, 아버지가 어떻게 순금 엄니를~?”

결국 이 사실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김 진사 댁 마님은 물론 갑수와 갑진, 그리고 순금에게도 알려지게 되었고, 천 서방은 또다시 행방이 묘연해진 채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