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옥례와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한 채 자신의 숙소로 돌아온 복돌(福乭)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옥례의 차가운 환상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던 복돌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 앞 개울가로 나선다. 그리고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마음을 달래느라 안간힘을 써본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가엾고 실망스러웠던지 긴 한숨만 터져나올 뿐 마음은 가라앉지 않는다. 옥례가 들어있는 안채가 바로 지척인데, 어쩌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 멀기만 한 것인지 그저 서글픈 생각을 뿌리칠 수가 없다.
오늘 따라 천지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에 쌓여있어, 달도 별도 그 무엇도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졸졸거리며 힘없이 흐르는 개울소리만이 귀를 어지럽힐 뿐이다.
‘결국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람이 되어 남남처럼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이란 말인가!’
그때였다.
‘휘익~~’ 하며 무언가 날라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어디선가 아주 희미하게 사람들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조심스럽게 내딛는 발자국 소리였다.
‘아니, 자정을 넘긴 지가 언젠데 웬 사람들 발걸음 소리지? 이곳은 사람이 오고 갈 수 있는 곳도 아니잖은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인적(人跡)은 처음엔 담장을 뛰어넘는 듯 발 내딛는 소리가 ‘쿵쿵’하며 여러 번 들리더니 한참 후에는 낮은 음성과 함께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그 발자국 소리는 남쪽 담장 근처에서 시작해 마당을 가로지르더니 북쪽 산 비탈 쪽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낸 십여 명의 괴한들은 하나같이 검은 옷을 입고 얼굴에는 검은 수건을 둘렀으며, 손에는 칼이나 낫 같은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를 헤치기 위해 들어온 자객임이 분명했다.
그들이 달려가고 있는 곳은 안채 쪽이었다.
‘가만있자∙∙∙∙, 그쪽은~~, 김삼천 대방과 옥례가 머무는 곳이 아닌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복돌의 머리를 스친다.
‘혹시∙∙∙∙? 대방과 옥례를 노린다는 것인가?’
번쩍 정신이 든 복돌은 급하게 숙소로 뛰어가 원행 길에 호신용으로 지니고 다니는 장도(長刀)를 빼 들고는 잽싸게 안채 쪽으로 달려간다.
우선 사람들을 깨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한 복돌은 적막을 깨는 듯한 급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 댄다.
“도둑이야––! 도둑이 들었다––! 도둑 잡아라––!”
안채로 몰려가던 무리들이 잠시 소리치는 복돌 쪽으로 힐끔 시선을 돌리더니 더욱 급하게 대청을 지나 방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간다.
“아악––!”
순간 방안에서 남녀의 비명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온다. 김삼천과 옥례의 비명소리였다.
그 소리에 놀란 복돌은 장도를 쥔 손아귀에 불끈 힘을 주고는 쏜살같이 대청마루 위로 뛰어오른다. 순간 대청에서 맞부딪친 괴한들과 복돌 간에는 격렬한 싸움이 벌어져 몇 명의 괴한들은 복돌의 칼을 맞고 쓰러지거나 도망을 치려고 안채 밖을 향해 달음질을 친다. 옥례의 생사가 걸린 문제라 그런지, 복돌은 개마고원(蓋馬高原)의 험산(險山)을 누비며 익힌 검술을 아낌없이 발휘하며 괴한들을 쫓아내는데 혼신을 다한다.
요란한 고함소리에 놀라 숙소 밖으로 뛰쳐나온 함흥상단 식구들도 상황을 깨닫고는 칼이며 몽둥이를 들고 안채에서 뛰쳐나오는 검은 괴한들을 향해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괴한들은 어둠 속에서 자신들의 신변을 감추기 위해 검은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복장은 침입자를 구분하는 표적이 되었다.
급하게 방안으로 뛰어든 복돌은 어둠 속에 어렴풋이 드러난 광경을 보고는 놀라움에 아연실색하고 만다. 김삼천 대방과 옥례는 피가 난자한 가운데 미동도 없이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엇? 안돼––! 옥례야––, 옥례야! 안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 심한 충격 속에 복돌은 쓰러져 있는 옥례를 끌어안는다. 그녀는 아직 희미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었으나, 어깨 쪽에 칼을 맞았는지 왼쪽 가슴과 팔에 피가 흥건했다. 자칫 죽을지도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의외로 복돌은 침착했다. 약제공급 때문에 회령 지역의 명의(名醫)가 누군지를 다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복돌은, 옥례를 들쳐 업고 가까운 약방을 찾아 정신없이 뛰기 시작한다.
“의원님––, 이 사람이 어깨에 칼을 맞았습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꼭! 살려주셔야 합니다, 의원님~~.”
어깨 쪽 환부를 살펴본 의원은 곧 지혈(止血)을 시키는 약초가루를 환부에 뿌리고는 칼을 맞은 상처의 크기와 깊이를 세밀하게 관찰한다.
곧이어 맥진(脈診)과 복진(腹診)을 번갈아 하며 환자의 몸 상태와 기력을 점검한다.
진찰을 시작한지 2각이나 흘렀을까~~.
의원은 약방문(藥方文)대로 약제(藥劑)를 지어 복돌에게 내밀며 환자의 상태를 자상하게 설명한다.
“환자는 곧 깨어날 것이요. 놀라서 잠시 혼절한 것 같으니 그리 염려치 않아도 될 것이요. 용케도 상처가 그리 깊어 보이지 않아요. 다만 상처부위가 덧날수도 있으니 연고를 계속해서 발라 주시고, 조석으로 약을 달여 먹이시요. 달포가 지나지 않아 거뜬히 일어날 것이요.”
하며 복돌을 안심시키고는 방을 나간다. 복돌은 옥례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그녀의 얼굴을 애처롭게 들여다본다. 그때 진료실을 나가던 의원이 갑자기 뒤돌아서며 말을 건넨다.
“참, 미쳐 말을 못했군요. 환자는 지금 임신 중이요. 태아에게 해로울 것이니 지어준 약 이외에 다른 약은 절대 먹이면 안 될 것이요. 환자는 지금 심신이 많이 지쳐 있으니 한동안 쉬면서 몸조리를 잘해야 할 것이요.”
임신 중이라는 이야기에 복돌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큰 충격을 받는다.
‘하~~, 임신이라니––, 옥례가 아이를 가졌단 말인가! 그렇다면∙∙∙∙, 분명 대방어른의 아이가 틀림없을 텐데∙∙∙∙, 이걸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빨리 대방어른께 알리는 수밖에∙∙∙∙. 대방의 아이라∙∙∙∙, 결국 옥례와는 영영 남이 되고 마는구나~~.’
옥례의 상처가 그리 중하지 않다니 다행한 일이지만, 불현듯 대방어른의 용태가 궁금해진다. 태어날 아이의 아비가 아닌가!
“의원님! 환자를 잠시 맡겨도 되겠습니까? 다른 부상자가 있어 상태가 어떤지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요.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복돌은 함흥상단 별관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내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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