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돌은 밀려오는 절망감에 온몸을 떨며 오열한다.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옥례가 한없이 야속했지만, 그보다는 불꽃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옥례의 신세가 가련하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눈에 환하게 비치던 옥례의 밝은 형색(形色)이 점차 어두운 잿빛으로 변해가는 것이 더더욱 가슴을 아프게 했다. 물론 옥례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무단(無斷)의 행로는 복돌도 이미 예감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다만 엇나가고 있는 옥례의 행보를 막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고, 이런 세상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자신의 앞날이 어찌될 거라는걸 알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인생 행로라는 건 언제나 때늦은 후회와 안타까움으로 점철되어 있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에게 다가올 앞날을 예단하는데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고,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는 것 또한 심통(心痛)에 빠질 것이 뻔하여 이를 회피하려 한다.
그들은 자신이 선택한 길이 평탄한 길일지 혹은 험준한 길일지 알지 못하면서 일단 들어서고 본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서, 그 길이 험도임을 깨닫고 후회하며 가슴을 친다. 뒤늦게 다른 길을 찾아보지만 그때는 이미 때가 늦어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길을 거리낌없이 뛰어들려는 심사는 무엇일까? 가야 할 길보다는 길 끝에 기다리고 있을 허상에 미리 매료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가졌을 때 비로서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부귀와 권세를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유가, 바로 그것들을 얻었을 때 행복해질 거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많은 사람들은 부단한 노력을 통해 부귀영화의 기회를 얻기도 한다. 그러나 어렵게 얻은 부귀영화를 행복으로 전환시키는 힘은 지극히 허약할 뿐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고, 천금을 지니고 있어도 불행해질 수 있는 인간의 오묘한 성정(性情) 때문일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부귀영화의 뒤에는 과도한 욕망이 저질러 놓은 부끄러운 앙금이 숨겨져 있게 마련이어서, 그것 또한 행복을 밀어낸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부귀와 권세는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행복은 주어지는 것도 쟁취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스스로 느끼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옥례도 부귀영화를 찾고, 그리고 행복을 잡으려는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옥례가 걸어가려는 ‘넓은 세상’ 저편에, 과연 행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녀가 선택한 사랑은 과연 올바른 것인가?
옥례가 진정으로 찾아가야 할 ‘사랑의 행방’은 과연 어디인가?
복돌은 한탄을 멈출 수 없었다.
미답(未踏)의 길을 허우적거리며 걸어가는 옥례의 모습이 너무도 가여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부귀영화가 어른거리는 ‘넓은 세상’에 도취된 채, 그저 앞만 보고 달릴 뿐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골마을 저변의 소박한 행복 같은 건 그녀에게 보일 리 없을 것이다. 어느새 그녀는 상류촌의 화려함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한참을 먹먹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복돌은, 어느 순간 마음을 다잡으며 불현듯 일어선다. 그리고는 옥례가 망상을 좇아 어디로 흘러가든 자신은 결코 그녀를 놓아줄 수 없다고 굳게 다짐한다. 오히려 더 가까이에서 그녀의 주변을 살필 것이라고 결심한다.
옥례의 행로에 촉각을 세우되, 그녀의 어떤 행실에도 휘둘리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
‘어차피 자신과 옥례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신랑각시가 되기로 한 사이가 아니던가! 그리고 그건 두분 엄니들도 바라는 바가 아닌가!’
다소 험이 있던 들 그건 생각하기 나름 아닌가! 험이라는 게 무예 대수란 말인가!
훗날, 어느 지점에선가 그녀가 지쳐 주저앉았을 때 분연히 일으켜 세워, 어엿한 정인(情人)으로 맞아들일 사람이 자신 말고 그 누가 또 있겠는가!
누가 뭐라 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옥례를 지켜줄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다짐한다.
훤칠한 청년 복돌은 성품이 우직해서 한번 품은 뜻은 좀체 굽힐 줄 모르는 곧은 청년이다. 그의 얼굴은 인중(人中)이 길고 입술이 뚜렷하여 어찌 보면 성격이 곧고 강직해 보이지만, 이마가 널찍하고 눈매가 서글서글한 것으로 보아 성격이 너그럽고 포용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지닌 청년의 풍모를 그대로 풍겨주고 있다.
그는 옥례에 대해 매사에 헌신적이다. 어린 시절부터 오누이처럼 함께 자랐지만, 그는 언제나 옥례의 곁에서 호위무사처럼 혹은 시종(侍從)처럼 정성을 다해 옥례를 감싸고 보호하는데 진력을 다해 왔다. 그는 옥례를 위하는 일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감당하려 했고, 오로지 그녀의 해맑은 미소를 바라보며 사는 게 그의 평생 소원이라는 걸 자랑이라도 하듯 털어놓는다. 그의 인생엔 옥례가 전부였다.
그런 옥례가 험한 장사판에 뛰어들더니 끝내는 재력가의 소실처럼 퇴락하여, 되돌아올 수 없는 어둠의 차안(此岸)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복돌은 그런 옥례를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기로 한다.
승승장구하던 함흥상단의 기세 또한 많이 약화되고 있는 것 같았다.
옥례와 열흘 넘게 운우지정(雲雨之情)에 빠져 있던 김삼천 대방은, 함흥으로 돌아가기가 무섭게 어떤 때는 옥례를 함흥으로 불러내고, 또 어떤 때는 스스로 경성으로 달려와, 중년의 남성은 남성대로, 청춘의 여성은 여성대로 마지막 불꽃이라도 태우려는 듯 끝없는 교정(交情)에 빠져들며 서로를 탐닉한다. 늦은 나이에 발악이라도 하듯 여색에 빠진 함흥상단의 김삼천 대방은 날카롭던 총기를 차츰 잃어가더니, 맹렬하게 넘쳐흘렀던 사업 기세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자고로 천지를 호령하던 영웅호걸도 여인 앞에서는 힘도 열정도 무력해지며 기력을 잃어간다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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