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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끝없는 여정"-12

“어르신, 안녕하세요~. 어르신께 농사일을 여쭙고 싶어 찾아 뵈었습니다.” 우선 한식과 창분이 고개를 조아리고 공손히 인사를 올리며 사정 말씀을 건네 본다. 청년과 젊은 처자를 번갈아 쳐다보던 어르신은 웬 젊은이들인가 의아해하면서도 태도가 반듯하고 공손해 보여 해코지할 사람들은 아니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안심한다. 점점 더 살벌해지고 있는 전쟁 탓으로 세상이 어지럽고 탁하다 보니 객 사람을 경계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사일이라면––! 그래, 뭘 알고 싶다는 게요?” “우선 인사 올리겠습니다. 이렇게 불쑥 찾아 뵙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만, 저는 장한식이라 하옵고, 이 사람은 제 아내 됩니다. 저희 부부는 7~8가구의 식구 20여명과 함께 개마고원 산촌에 살고 있습니다. 이번 전란으로 여러..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11

짐승보다 못한 종살이가 너무도 지겹고 서러워, 차라리 이 풍진세상을 하직하고 신분차별 없는 무등(無等)의 지대로 들어와 사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호사려니 생각하고 개마고원 험산준령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과연 이런 험산에서 무얼 먹고 살아야 할지를 미쳐 따져보지도 못한 채, ‘그저 뭘 해먹든 입에 풀칠이야 하지 않겠나’ 라는 막연한 가망을 품고 들어온 게 이들 마을사람들 모두의 속사정일 것이다. 물론 산촌마을 눈골로 들어오면서 얼마간의 먹을 거리를 짊어지고 들어오긴 했지만 그걸로 내년 봄 수확 때까지 견딘다는 건 어림도 없는 망상이어서, 정작 엄동설한의 길고 긴 겨울을 어찌 보내야 할지를 생각하면 몸이 오싹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질 뿐이다. 그렇다고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본 들 반겨줄 사람이 있는 것..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10

(제2부) 산촌(山村)의 작은 행복 “순옥아––, 뭐 먹고 싶은 거 없니? 장서방이 오늘 산남면(山南面)에 가는 길에 구해 달랄테니,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글쎄, 저기~~, 혹시 가자미 구할 수 있을까? 요샌, 웬일인지 회국수가 이리도 먹고 싶은지 모르겠어. 감자 녹말 국수에 가자미 회를 쳐서 먹으면 속이 쑥 내려갈 것 같아∙∙∙∙.” “그래! 알았어. 내 꼭 구해오라고 이를 게. 가자미가 길주(吉州)∙명천(明川) 앞바다에서 많이 잡힌다니까, 아마 구할 수 있을 거야. 나도 순옥이 덕에 가자미 회국수 맛 좀 볼 수 있겠구나.” 순옥이가 산달이 다가오니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닌 모양이지만 두메산골 궁벽한 땅에 무슨 먹을 게 있을 리 만무하니 그저 처량한 생각이 들 뿐이다. 한때 이..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9

그날 밤 두 남녀는 남성의 원초적 욕정과 힘에 의해 일방적으로 한 몸을 이룬다. 충격적 만남으로 첫날 밤을 보낸 그들은 한동안 격한 원망과 자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창분에게 그 청년은 생명 같은 순결을 훔쳐간 첫 남성이기에, 단지 힘으로 몸을 빼앗아 간 한 때의 남성일 뿐이라고 체념하며 털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건 미련도 정리(情理)도 아닌, 여인의 운명 같은 것이었다. 결국 창분(彰芬)과 청년 한식(漢植) 사이에 벌어졌던 하룻밤의 악연은 평생을 넘나들며 이어지게 될 천륜(天倫)의 사슬로 묶이게 된다.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에 찌든 남성천하의 세상에서 신분 낮은 많은 여성들이 힘있는 남성들에게 강압과 감언이설로 욕정의 제물이 되곤 하지만, 일단 욕망을 채운 남성들은 일말의 책임의식은커녕 언제..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8

'아아~, 아니--, 이게 뭐지?' 어렴풋이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위에서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아악--! 누–, 누--, 누구요? 비켜요!” 창분은 한껏 소리를 질렀으나, 입을 틀어막고 있어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왠 사내가 창분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힘을 주어 벗어나려 해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까 그 반도(叛徒)의 우두머리 청년이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청년은 창분의 저고리를 풀어 헤친 채 한 손으로는 가슴을 움켜지고 있었고, 한 손은 창분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치마는 벗겨진 채 허리춤으로 올라와 있고. 속옷은 발 끝에 걸려 있어 이미 몸은 열려 있었다. 겨우 청년의 손을 입에서 떼어 낸 창분은 있는 힘을 다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 친다. “비켜요..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7회

겁에 질려 허둥대는 창분을 안심시키며 겨우 삼수군의 정세를 전해들은 우두머리 청년은 맥이 빠지는지 한참을 허탈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대원들을 불러모아 무언가 심각하게 상의(相議)를 하고는 뿔뿔이 흩어져 산 아래쪽으로 급히 내려간다. 아마도 정웅진 부사가 오리무중이라는 정황을 본부에 알리기도 하고, 특히 부사가 들어갔다는 삼수군(三水郡) 쪽이 관군에게 점거됐는지를 내밀하게 확인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추측되었다. “그런데, 내가 저 청년을 어디서 보았지? 분명 안면이 있는 얼굴인데∙∙∙∙.” 창분은 그 우두머리 청년이 훤칠하게 장대하여 전에 어디선가 마주친 적이 있는 사내임을 어렴풋하게 나마 기억에 떠올렸다. 물론 사내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어디서 본 얼굴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그들..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6

경성부사 정웅진을 생포하려는 왜병의 앞잡이 국경인 반도 창분은 산채로 가는 길목에서 마침 대덕산에서 내려오던 박웅기 아재비와 맞닥뜨린다. 아마도 아침 일찍 순옥을 대덕산 초옥(草屋)으로 데려다 주고 이제야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아, 아재비––! 아재비–, 큰일 났어요!” “아니, 창분이 아니냐! 그런데 왠 호들갑이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것이야?” “저기––, 왠 장정들이 부사 어른을 잡아야 한다며 산을 온통 뒤지고 난리가 났어요. 아마 소문에 돌던 반도(叛徒)들인 모양이에요. 빨리 피하셔야 해요, 빨리요––!” “뭐라고? 반도들이라고? 알았다. 빨리 부사 영감께 알려야겠다. 어서 가자.” 마침 정웅진 부사는 산채 밖 바위에 걸터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쩌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하~..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5

양반이 노비를 취해 아이를 낳더라도 그 아이는 생모의 신분에 따라 노비가 되어야 하는 게 조선의 신분제도였다. 신분이 높은 남성들에게 자신의 정염(情炎) 행위의 책임을 면탈해주는 그들 만의 제도였다. 따라서 순옥이 아이를 낳더라도 부사(府使)의 자식으로 인정받는다는 건 전혀 가당치 않은 일일 뿐 아니라, 오히려 눈엣가시가 되어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쫓아내는 것이 조선 양반들의 한결 같은 관행이었다. 완벽한 증거인멸 행위가 아닌가! “아재비, 그러면 저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요?” 순옥이 자신이 이곳을 떠나 기거할 곳이 어딘지 목이 메인 목소리로 묻는다. “저쪽 위, 산남면에 걸쳐 있는 대덕산이 아주 조용하고 지낼 만하다더라. 그곳 중턱에 조그만 초가를 봐 났다. 지은 지는 꽤 오래된 집이지만 사는 데..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4

국경인은 한껏 자기도취에 빠진 채 잔인한 살상을 즐기며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금수 같은 행각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그들 반도들은 회령(會寧)과 나진(羅津) 그리고 경성(鏡城) 등 도처에서 양반과 호족을 타도하여 서민의 설음을 풀어야 한다는 미명 하에 연일 학살과 방화를 일삼아, 너른 산지인 도회(都會)가 온통 불길에 휩싸여 붉은 대낮을 이루었고, 수많은 억울한 인명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고 있었다. 국경인으로 인해 함경도 땅이 온통 망령의 땅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한편, 산채에 머물면서 군식구가 되어버린 창분(彰芬)과 몇몇 노복(奴僕)들은 주인댁 마님의 눈총이 무서웠던지, 눈만 뜨면 산 속으로 들어가 버섯이나 약초를 캐거나 아니면 땔감을 몇 짐씩 저 나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대신하고 있었다. 해..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3

선조(宣祖) 임금은 한양을 버리고 압록강 변으로 도주행각을 벌일 때, 장남 임해군(臨海君)과 6남 순화군(順和君)을 왜군의 침입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함경도 쪽으로 도피시켜 은신케 했다. 이들 왕자 일행은 안전지대를 찾아 헤맨 끝에 두만강 연안의 회령(會寧)까지 올라와 도호부 안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곳 회령은 세종(世宗) 임금 때 김종서(金宗瑞)에 의해 설치된 두만강 변 6진(六鎭)의 하나로 민심이 순후하여 사람 살기가 좋은 고장이다. 평상시 잔혹하고 폭력적인 성품으로 악명 높았던 임해군은, 얼마 전 아우인 광해군(光海君)이 세자(世子)로 책봉되자, 자신이 장자임에도 동생에게 세자 자리를 뺏겼다고 울화를 터트리며 분통을 참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이 이곳으로 접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