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끝없는 여정"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7회

추동 2020. 7. 27. 09:29

개마고원 산중에는 화전민이 쓰던 고방들이 드물게 남아있다.

겁에 질려 허둥대는 창분을 안심시키며 겨우 삼수군의 정세를 전해들은 우두머리 청년은 맥이 빠지는지 한참을 허탈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대원들을 불러모아 무언가 심각하게 상의(相議)를 하고는 뿔뿔이 흩어져 산 아래쪽으로 급히 내려간다. 아마도 정웅진 부사가 오리무중이라는 정황을 본부에 알리기도 하고, 특히 부사가 들어갔다는 삼수군(三水郡) 쪽이 관군에게 점거됐는지를 내밀하게 확인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추측되었다.

 

“그런데, 내가 저 청년을 어디서 보았지? 분명 안면이 있는 얼굴인데∙∙∙∙.”

 

창분은 그 우두머리 청년이 훤칠하게 장대하여 전에 어디선가 마주친 적이 있는 사내임을 어렴풋하게 나마 기억에 떠올렸다. 물론 사내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어디서 본 얼굴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그들이 모두 사라진 이후에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던 창분이, 한식경이나 지나서야 겨우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제는 안심해도 되겠다 싶어 숨을 돌리려는 순간, 사립문 쪽을 바라보고는 기겁을 한다. 분명 다른 장정들과 함께 사라졌던 우두머리 청년이 불쑥 눈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피로에 지친 듯한 모습으로 산채에 들어선 그는, 겁에 질린 채 잔뜩 웅크리고 있는 창분을 불러 세운다.

 

“이것 봐, 처자! 나는 평민을 착취하며 횡포를 부리던 부사를 잡으려는 것이지, 처자 같은 양민(良民)을 해치려는 사람이 아니야. 나와 처자는 한 편이나 다름없어. 그러니 겁먹지 말고 안심하라고. 그건 그렇고, ∙∙∙∙혹시 밥 좀 먹을 수 있겠나?"

 

아마도 산중을 헤매면서 끼니 한번 제대로 챙기지 못하다 보니 몹시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우두머리 청년은 키가 크고 몸집이 장대하여 마치 마을 어귀에 서있는 장승을 연상케 하지만, 얼굴 생김은 의외로 양갓집 도령처럼 귀티가 풍겼고 말투도 아주 젊잖아 보였다.

 

“아–, 네! 쌀이 남았는지 알아보고요, 곧 밥상을 지어 올릴 테니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창분은 부리나케 부엌으로 들어가 먹을 게 있는지 가마솥이며 찬장, 선반 등을 뒤져본다. 하지만 밥솥은 텅 비어 있고, 찬거리 하나 보이는 게 없었다. ‘이를 어쩌면 좋지’ 하고 난감해하며 뒤꼍에 있는 헛간이며 장독대를 샅샅이 뒤지다가, 용케도 부엌 뒤 헛간 바닥에 떨어져 있는 쌀자루를 발견하고는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얼른 밥을 안치고, 깨진 장독간에서 찾은 김치와 된장으로 된장국을 끓이고, 장아찌와 장을 곁들이니 제법 그럴싸한 밥상이 차려질 수 있었다.

 

방안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청년은 밥상을 들고 들어가자 벌떡 일어나 앉더니, 잠깐 창분을 바라보며 고마운 듯 미소를 보내고는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잠시 후 부엌에서 숭늉 한 그릇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보니 이미 밥상엔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이 깡그리 먹어 치운 뒤였다.

 

“어이고, 잘 먹었다~~. 처자, 맛있게 잘 먹었어––.”

 

창분이 숭늉 그릇을 방바닥에 내려놓은 뒤 빈 밥상을 들고 문밖으로 나오려다 보니, 그 청년은 어느새 밥 먹던 자리에 스르르 쓰러지더니 이내 코를 골기 시작한다.

부엌에서 남은 밥으로 요기를 마친 창분은, 청년의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자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하는 수없이 산채를 나온 창분은 자신의 누거(陋居)인 고방(庫房)으로 올라와 등에 불을 밝혀 놓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꿈결같이 보낸 하루를 뒤돌아본다.

오늘 하루가 마치 몇 달 몇 년을 보낸 것처럼 길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부사 어른은 잘 피신하셨겠지! 그나저나, 순옥이는 어찌되었을까? 내가 가서라도 순옥을 구완해야 하는 건 아닌가? 우두머리 청년은 언제쯤이나 떠나갈 것인가? 그 청년이 떠나가야 그나마 조금은 안심이 될 텐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다 보니 풀벌레 소리와 함께 밤은 깊어만 갔고, 어느 순간 창분은 너무도 고단했던지 연신 하품을 쏟아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모처럼 아주 깊은 단잠에 빠져든 것이다.

 

어느 순간이었다.

깊은 잠에 취해 있는데도, 어인 일인지 생시처럼 의식이 또렷하다.

 

“으~, 응~! 꿈속인가~~, 생시인가~~!” 어? 어째 몸이––, 몸이 왜 이런 거지?”

 

가위에 물린 것처럼 허우적거릴 뿐, 당최 꼼짝 할 수가 없다. 손발도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소리를 지르려 해도 왠지 입이 막혀 있어, 말을 할 수도 숨을 쉬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온몸은 아무것도 가린 것 없이 위아래가 맨몸으로 훤히 드러나, 허전하게 열려 있는 느낌이다.

 

“이게 뭔 일인가?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