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이 노비를 취해 아이를 낳더라도 그 아이는 생모의 신분에 따라 노비가 되어야 하는 게 조선의 신분제도였다. 신분이 높은 남성들에게 자신의 정염(情炎) 행위의 책임을 면탈해주는 그들 만의 제도였다. 따라서 순옥이 아이를 낳더라도 부사(府使)의 자식으로 인정받는다는 건 전혀 가당치 않은 일일 뿐 아니라, 오히려 눈엣가시가 되어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쫓아내는 것이 조선 양반들의 한결 같은 관행이었다. 완벽한 증거인멸 행위가 아닌가!
“아재비, 그러면 저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요?”
순옥이 자신이 이곳을 떠나 기거할 곳이 어딘지 목이 메인 목소리로 묻는다.
“저쪽 위, 산남면에 걸쳐 있는 대덕산이 아주 조용하고 지낼 만하다더라. 그곳 중턱에 조그만 초가를 봐 났다. 지은 지는 꽤 오래된 집이지만 사는 데는 별 불편함이 없을 것 같더라. 우선 그곳으로 옮겨서 지내도록 해야겠다. 먹을 양식은 내가 직접 보내줄 것이니 그리 알고.”
“아재비, 그러면 아이는––, 아이를 낳으면 어찌해야 하나요?”
“그건~~, 네가 키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겠느냐! 그리고 앞으로 부사어른 눈앞에는 얼씬도 말아야 한다. 그래야 네가 온전할 수 있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지? 내 그리 알고 잠시 후에 너를 그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니 해 뜨는 대로 떠날 준비를 하거라–, 알겠지!”
집사 박웅기와 순옥이가 나눈 이야기를 빠짐없이 엿들은 창분은, 자신에게 들이닥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슴이 가쁘게 뛰며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순옥이가 부사어른의 아이를 가졌다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아마도 순옥은 부사 어른의 이부자리 시중을 들다가, 덮쳐오는 부사 어른에게 반항 한번 못해보고 욕정을 채워주는 노리개가 되었을 것이고, 그녀 또한 인간인지라 거듭되는 행위에 몸은 점차 익숙해져 갔을 것이다. 욕정의 끝에 아이가 생기는 것이야 당연한 것 아닌가!
아무튼 박웅기 아재비의 말은 적당한 구실로 순옥을 집안에서 쫓아내려는 속셈이 분명해 보였다. 연약한 순옥에게 몸으로 수발을 들게 하다가 아이가 생기니까, 체면 때문에 쫓아버리려는 부사가 한없이 원망스러웠지만, 노비 주재에 달리 어쩔 도리는 없었다.
“그나저나 순옥이는 이 험준한 산골에서 목숨이나마 부지할 수 있을 것인가?”
저항하지 못하는 힘없는 여인에게 강압적으로 임신을 시켰으면 태어난 아이만이라도 자식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이 인륜이거늘, 오히려 죄인이 되어 쫓겨나야 하는 판이니 이 어찌 천륜을 지키는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양반은 하늘아래 더없이 존귀한 존재지만, 하층민은 양반의 도구에 불과한 나라, 아––, 가련한 조선이여–!
다른 노비와 달리 관아 뒤편의 향교(鄕校)에서 어깨너머로 웬만한 경서(經書)를 터득했던 창분은, 이런 조선의 신분제도에 대해 깊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순옥은 다시는 못 올 길을 떠나가듯이 슬픈 자취를 남기고 그렇게 부사댁 집사 박웅기를 따라 대덕산(大德山)으로 떠나갔다.
반면, 창분은 오늘도 여전히 다른 노복들 틈에 끼어 산으로 올라갔지만, 순옥의 처지가 너무도 가엾고 안쓰러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지(死地)로 끌려가는 축생(畜生)의 모습으로 대덕산을 향해 떠나가는 순옥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도 없는 깊은 산속에서 누가 해산(解産)하는 순옥을 도와 구완을 해줄 것이며, 과연 이를 견뎌내고 혼자서 아이를 낳을 수는 있는 것인가? 혹여 아이를 낳다가 순옥의 목숨이 잘못되는 건 아닐는지~~.”
이런 생각에 깊이 빠진 창분은 해가 떨어지려면 아직도 멀었지만, 일행에서 홀로 떨어져 숙소인 고방(庫房)을 향해 터덜터덜 산비탈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 건너편 산등성 언덕배기 밑으로 급하게 산을 올라가는 사람들의 밭은 숨소리와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는 한두 사람이 아닌 꿰나 많은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이곳까지 웬 사람들이 올라온 것인가?”
나무 등걸 뒤에 숨어 사람들의 행방을 살펴보니 손에 곡괭이며 몽둥이를 쥐고 있는 여
남은이나 되는 무리들이 살기를 내뿜으며 골짜기를 뒤지고 있었다.
“저쪽 골짜기에 분명 정웅진이 숨어 있을 것이다. 독 안에 든 쥐새끼나 다름없으니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두령으로 보이는 장대한 사내가 일행에게 단단히 이른다.
순간, 창분은 이들이 부사 어른을 잡으러 나선 반도(叛徒)들임을 알아채고는, 그들이 지나가기가 무섭게 쏜살같이 산채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급하게 산길을 달리다 보니 엎어지고 찢겨 지며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아픈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뛰기만 하며 부사 어른이 은거하는 산채를 향해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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