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끝없는 여정"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3

추동 2020. 6. 29. 08:16

선조(宣祖) 임금은 한양을 버리고 압록강 변으로 도주행각을 벌일 때, 장남 임해군(臨海君)과 6남 순화군(順和君)을 왜군의 침입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함경도 쪽으로 도피시켜 은신케 했다. 이들 왕자 일행은 안전지대를 찾아 헤맨 끝에 두만강 연안의 회령(會寧)까지 올라와 도호부 안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곳 회령은 세종(世宗) 임금 때 김종서(金宗瑞)에 의해 설치된 두만강 변 6진(六鎭)의 하나로 민심이 순후하여 사람 살기가 좋은 고장이다.

 

평상시 잔혹하고 폭력적인 성품으로 악명 높았던 임해군은, 얼마 전 아우인 광해군(光海君)이 세자(世子)로 책봉되자, 자신이 장자임에도 동생에게 세자 자리를 뺏겼다고 울화를 터트리며 분통을 참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이 이곳으로 접근해오자, 회령 주민들은 큰 위협을 느끼며 불안에 떨고 있었다. 왕자가 두 사람씩이나 와 있으니 필경 왜적의 침입은 불문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임해군과 순화군은 전란 중임에도 불구하고 회령 부사 문몽원(文夢轅)에게 왕자인 자신에게 대접을 소홀히 한다며 고성을 질러대기 일쑤였고, 나중에는 종을 시켜 회령의 큰 집들을 골라 재물은 물론 먹을 것을 강탈하는 등 횡포가 자심했다. 이러한 작태를 본 백성들은 당연히 크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무서워 도망쳐 온 주제에 왕자 신분이랍시고 사람을 업신여기고 있으니~~~, 이들을 그냥 보아 넘길 일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 백성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도망쳐 나온 불량배들까지 먹여 살려야 한단 말인가?”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왕자들의 행패를 비난했고, 불평이 높아질수록 왕자 일행의 처지는 더욱 불리해지기만 했다. 회령의 호족인 국경인(鞠景仁)은 대대로 이곳에서 아전(衙前)으로 살아왔고, 그의 집을 중심으로 일가친척들이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있었다. 국경인의 일가들은 회령 부사의 명령으로 왕자 일행 수십 명이 먹을 식사를 끼니때마다 마련하여 올리고 있었다. 큰 고역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임해군과 순화군은 자신들이 왕자임을 표면에 내세우며 기고만장한 언행을 일삼았고, 심지어 왕자를 따라온 궁녀와 종들조차도 국경인 집안 사람들을 하인(下人) 다루듯 깔보고 음식을 타박하는 등 경거망동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이런 왕자 일행의 행태를 보다 못한 국경인은 자신의 동료인 아전들을 모아 놓고 이들을 쫓아낼 방도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여보게들––. 한양에서 쫓겨온 왕자라는 것들이 마음대로 행패를 부리고 있는데, 그 꼴을 그대로 두고만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게 말일세! 정말이지 눈꼴사나워 못 볼 지경인데 어찌 그냥 놔둔단 말인가!”

 

“왜병의 침입이 임박했다는데, 왕자 두 놈 때문에 회령이 자칫 쑥대밭이 될지도 몰라. 왕자를 속히 회령에서 쫓아내야 우리가 살 수 있다고––!”

 

여러 사람들이 왕자 일행의 횡포에 분노를 터트리며 성토하느라 열을 올렸고, 좌중이 흥분에 빠져들자 국경인이 준비한 계책을 내놓는다.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닐세! 왕자들을 쫓아내고, 우리 회령 군민이 왜병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려면––, 우리 힘으로 왕자를 붙잡아 왜장(倭將)에게 넘겨주면 만사가 해결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조선은 국운이 다 끝나가고 있으니 말일세.”

 

“맞아! 그리하면 되겠구먼. 다같이 뭉쳐서 단번에 요절을 내도록 하세.”

 

“결국 우리는 왕자들을 내쫓고, 왜병들로부터 보호를 받는 일석이조의 이득을 얻는 셈이군 그래! 우선 극비리에 무기고에서 필요한 무기들을 확보토록 하세나!”

 

순식간에 의견은 하나로 모아졌고, 억샌 장정들로 왕자 일행을 사로잡기 위한 반도(叛徒)들이 꾸려졌다. 그들 반도들은 꼼꼼하게 짜인 체포계획에 따라 1차로 회령 부사 문몽원을 잡아 도호부를 장악한 후, 왕자 일행을 일시에 체포하여 북상하는 왜군에게 넘기기로 작당한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관리하고 있는 무기고로 달려가 무기를 탈취하더니, 마치 눈 앞에 자신들의 세상이 환하게 펼쳐지기라도 한 것처럼 기세 등등하여 눈에 살기를 번득이며, 도호부를 향해 지체 없이 몰려간다.

 

여름도 거의 끝나가던 어느 날.

국경인(鞠景仁)은 반도(叛徒)들 수십 명을 이끌고 회령부사(會寧府使)가 있는 동헌으로 쳐들어갔다. 부사 문몽원(文夢轅)과 순변사 이영(李瑛)은 마침 남문 문루에서 더위도 식힐 겸 술상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난데없이 한 떼의 장정들이 쳐들어오니 이영은 어느새 뺑소니를 쳐 달아났고, 부사는 나름 국경인을 나무라며 큰 소리를 치다가 결국 붙잡히고 만다. 반도들은 부사를 포박한 후 목에 칼을 들이댄 채, 왕자와 호종관을 넘겨주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한다. 부사는 어쩔 수없이 내아(內衙)에 있는 왕자의 처소를 알려주었다. 국경인과 그 일당은 안으로 쳐들어가 두 왕자와 부인, 시녀 등 가릴 것 없이 모조리 포승으로 몸을 묶고, 호종 대신 김귀영 등도 동시에 잡아다가 내아 대청 앞 마당에 꿇어앉혔다. 얼떨결에 잡혀온 왕자 일행은 영문도 모른 채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국경인은 왕자 앞에 나서서 준열하게 호령한다.

 

“너희들은 이 나라의 왕자로서 응당 백성을 위하고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오히려 백성들을 괴롭히며 행패나 부리는 행악(行惡)이 자심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너희들을 처단할 수 있지만, 왜병이 당도하는 대로 왜장에게 인도하여 너희들의 죄를 묻도록 하겠다.”

 

갑작스러운 강압에 위협을 느낀 왕자들은 순간 공포에 사로잡히며 서서히 몸이 얼어붙는다.

 

수일 후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가 이끄는 일본 침략군이 회령으로 들이 닥쳤다.

그들은 이곳까지 오는 동안 각 지역의 관청과 양민들을 휩쓸면서 가는 곳마다 도륙과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나 각 고을의 수령들은 이미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뒤인지라 주로 하급 아전들을 패대기 치거나, 동헌(東軒) 창고에 보관 중인 곡물과 육류, 가금류 등 병사들이 먹을 군량물자(軍糧物資)를 탈취하며 목적지인 회령에 당도한 것이다.

 

국경인으로부터 포로들을 인계 받은 가토는 임해군과 순화군 등 왕자와 호종 대신들을 산중에 가둬 놓고, 이들을 이용하면 경쟁관계에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 앞서는 큰 공을 세워 태합전하(太閤殿下)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부터 큰 신임을 받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가토는 왕자들을 포획한 공로로 회령과 경성 등 주변 고을을 국경인(鞠景仁) 일당이 다스리도록 허락하였다. 함경도 일대가 자신의 수중에 들어온 것을 확인한 국경인은 스스로를 북병사(北兵使)라 칭하고, 우선 왜병을 피해 지하로 숨어버린 고을 수령들을 추적하여 일망타진하기로 한다. 이들을 색출하여 왜군에게 넘겨줌으로써 왜장 가토의 신임을 얻는 것은 물론, 지역주민들에게 자신의 위세를 한껏 높여보겠다는 심산이었다. 반군의 타격 표적은 지방 수령만이 아니었고, 행세깨나 하며 거들먹거리던 지방 양반들이 모두 해당되었다. 그들은 주도(主盜)인 왜놈들보다도, 자신들을 지배했던 조선 양반들에게 더 큰 원한을 품고 있었다.

 

추포(追捕) 대상자 중 첫 번째 손가락에 오른 인물이 바로 경성부사 정웅진이었다.

경성도호부의 아전들과 종사원들은 이미 일본군에 의해 참살을 당할 대로 당한 뒤였지만 용케 살아남은 양인(良人) 출신의 일부 말단 아전들은, 자신의 가족과 동료 관원들은 물론 죄 없는 양민들을 죽게 만든 모든 학살의 원인이 혼자만 살겠다고 소리 없이 도주해버린 부사 정웅진에게 있다고 비분강개했고, 반드시 부사 일당을 붙잡아 죽은 이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혈기를 모았다. 이들은 즉시 국경인 반군에 가담하여, 부사가족이 숨어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개마고원 일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왜병의 하수인이 된 조선 반군 국경인(鞠景仁)과 그 일당이 가토의 사주에 의해 벌인 참혹한 인간 도살 행위는 오히려 왜병들이 저지른 참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극에 달했다.

 

큰 재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재난을 불러오는 모양이다. 일본군의 침략과 학살로 피투성이가 된 양민들에게 동족 반도들의 또 다른 탄압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늘은 무엇 때문에 조선에 대해 이렇게도 분노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이런 재앙은 하늘의 분노가 풀리기 전까지는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세상을 뒤덮고 있는 하늘을 향해 감히 항변하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하늘이 내리는 징벌은 너무도 가혹하고 원망스러워 서럽게만 느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