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prologue)
주인공 설화(雪花)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함경도 개마고원(蓋馬高原)의 갑산(甲山)이라는 산골이다. 한반도의 지붕이라고 일컬어지는 데다, 사면(斜面)은 경사가 급하고 험준해서 어지간해서는 사람들이 오르내리기에 힘겨운 산악지대다. 사람의 발길이 별로 닿지 않아서 그런지 이깔나무, 가문비나무, 사시나무 등 추운 고지대에서 자생하는 침엽수(針葉樹)가 자연상태 그대로 자라나 울창한 원시림을 이루고 있다.
갑산군 서북쪽 외곽의 회린면(會麟面)과 산남면(山南面) 사이를 가로 지르는 대덕산(大德山)의 중턱 산골마을이 설화가 태어나 자라난 그녀 나름의 안식처다. 사실 이 지역은 한반도를 통 털어 가장 추운 고산지대로, 웬만해서는 사람이 터전을 잡고 살기가 쉽지 않은 척박하기가 이를 데 없는 산간벽지(山間僻地)다. 이곳 갑산 일대는 예로부터 중죄인을 귀양 보내는 유배지로 손꼽혔으며, 한번 이곳으로 귀양을 오면 다시는 살아서 돌아갈 수 없다고 알려질 정도로 사람들이 꺼려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설화는 타지(他地) 사람들의 일상(日常)을 따로 접해본 적이 없어, 그곳의 환경이 얼마나 낙후되었고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잘 알지 못했으며, 그저 사람들의 삶이란 게 다 그러려니 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설화가 사는 이곳 산골마을은 여름철 서너 달을 빼고는 일년 내내 많은 눈이 내려, 천지가 온통 눈으로 덮여 있는 마을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눈골(雪村)로 통하고 있다. 그녀의 이름 역시 얼굴이 눈꽃(雪花)처럼 희다고 해서 그냥 설화(雪花)라 불려 진다.
이 마을에는 왜군(倭軍)들의 살상(殺傷)을 피해 들어온 이십여 호의 피난민들이 화전(火田)을 일구며 나름의 삶터를 일궜고, 감자나 밀, 혹은 귀리를 재배하거나 약초나 버섯을 채집해서 산남(山南) 장터에 내다팔아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벽지마을이다.
설화 일가(一家)가 이런 척박한 산골에 자리를 잡게 된 데는 어쩔 수 없는 사연이 있었다.
설화의 할머니 창분(彰芬)네는 전대(前代)로부터 이어오는 함경도 지방의 관노비(官奴婢)였다. 아주 오래 전, 열 두 살 된 창분을 두고 그녀의 엄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 역시 엄니의 뒤를 이어 세습노비(世襲奴婢)가 되었고, 엄니가 속해 있던 함경도 경성(鏡城)의 도호부사(都護府使) 숙소에서 부사영감과 가족들의 일상을 수발하는 솔거노비(率居奴婢)로 살고 있었다. 한동안은 엄니를 잃은 충격으로 부엌에 딸린 찬방(饌房)에 틀어박혀 울기만 하더니, 어린 나이에도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었던지 어느 순간 툭툭 털고 일어나 부엌 잡일이나 심부름 등 제 할 일을 찾아 곧잘 제 몫을 감당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창분은 어린 시절부터 유별나게 살결이 희고 생김새가 예쁘장하여 내아(內衙)의 식솔들은 물론 관원들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했으며, 그런 연유로 엄니 생각은 쉽게 잊은 채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나라에 큰 위기가 빠르게 닥쳐왔고 한반도 전체가 혼란에 빠진다. 일본군의 침공으로 임진왜란이 벌어진 것이다. 전란의 원인은 전적으로 임금의 오판으로 시작되었다. 한 나라의 군주(君主)가 국방을 튼튼히 하여 나라와 백성을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사리사욕에만 함몰된 나머지, 죄 없는 백성들만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전하! 신(臣), 적군을 격퇴하라는 어명을 받았사오나 이를 실행치 못하는 불충(不忠)을 저질렀나이다! 소장(小將), 이러한 불충을 깊이 자책하오며 심히 부끄러운 심정으로 전황(戰況)을 아뢰옵나이다. 적군(敵軍)의 기세가 빠르고 강대하여 신의 군대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통탄하게도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이 이미 적군의 수중에 넘어간 뒤였습니다. 신(臣)과 아군(我軍)은 어떻게든 왜적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 목숨 건 전투를 계속하고 있사오나, 워낙 빠른 속력으로 북진하는 왜적을 막는 것은 불가할 것으로 판단되옵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왜군의 한양(漢陽) 입성이 임박해 보이오니, 전하께서는 속히 한양을 떠나 옥체를 보존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충주 전선에서 적군에 사로잡히는 치욕을 거부한 채 탄금대(彈琴臺)에 몸을 던져 산화한 조선 최고의 명장 신립(申砬)이, 죽기 직전 선조(宣祖) 임금께 올리는 눈물의 장계(狀啓)였다. 이 장계가 신호탄이 되어 임금은 압록강 변 의주(義州)를 향해 도피 행각에 나섰고, 임금이 버린 조선반도는 왜적의 발 밑에 짓밟히며 황량한 폐허로 변해갔다. 함께 땅을 일구고, 품앗이로 밭을 갈며 순박하게 살아가던 민초들은, 땅도 초가도 모두 잃고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버려진 부랑자(浮浪者)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그렇게 한반도를 끔찍한 망령(亡靈)의 땅으로 만들었던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임금과 조정이 아닌 연약한 백성들의 의기로 종전(終戰)을 맞은 지 고작 38년––.
전쟁의 상흔(傷痕)이 미처 걷히기도 전에 또다시 위난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이 터진다.
두 번의 전란으로 모계 혈족인 설화 할머니 창분(彰芬)네, 설화 어머니 옥례(玉禮), 그리고 설화(雪花)에 이르기까지 3대 모녀에게 견디기 어려운 참담한 형극의 세월이 시작된다. 그러나 환란으로 매몰되어가는 인성 속에서도 사랑의 온기가 솟아오르며, 형극 속에서 생명을 재생시켜주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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