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끝없는 여정"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4

추동 2020. 7. 6. 08:44

신분이 낮은 여인들은 상전 남성의 성적 노리개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국경인은 한껏 자기도취에 빠진 채 잔인한 살상을 즐기며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금수 같은 행각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그들 반도들은 회령(會寧)과 나진(羅津) 그리고 경성(鏡城) 등 도처에서 양반과 호족을 타도하여 서민의 설음을 풀어야 한다는 미명 하에 연일 학살과 방화를 일삼아, 너른 산지인 도회(都會)가 온통 불길에 휩싸여 붉은 대낮을 이루었고, 수많은 억울한 인명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고 있었다. 국경인으로 인해 함경도 땅이 온통 망령의 땅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한편, 산채에 머물면서 군식구가 되어버린 창분(彰芬)과 몇몇 노복(奴僕)들은 주인댁 마님의 눈총이 무서웠던지, 눈만 뜨면 산 속으로 들어가 버섯이나 약초를 캐거나 아니면 땔감을 몇 짐씩 저 나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대신하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면 그 지역은 겨울 날씨 못지않게 추워져 주인댁 구들에 군불이라도 지필 장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창분에게는 동갑내기 순옥(順玉)이 함께 하고 있었다.

경성 관아의 사랑채에서 퇴청하신 부사어른의 의복 시중이며 이브자리며, 주안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수발하던 순옥인지라 당연히 주인 따라 이곳까지 왔겠다 싶었는데, 요즈음 웬일인지 마님의 눈총이 유별나게 극심하여 부사어른이 묶고 있는 산채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고 있었다. 경성 관아에서 함께 자라다시피 한 창분과 순옥은 왠지 성격은 판이하게 서로 달랐다. 창분은 자신의 신세가 노비인 것을 항상 한탄하며 출생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붙임성이 좋고 성격이 적극적이며 다정다감하여 이 사람 저 사람과 격의 없이 지내기를 즐겨 하는 성품인데 반해, 순옥은 말수가 적고 항상 순종하며 수동적인 성향으로 그야말로 전형적인 여성의 성품을 지니고 있는 여인이다. 그러나 둘은 서로를 채워주고 덜어주면서 친 자매처럼 의지하며 살아온 사이다. 다만 근간에 와서 무슨 말 못할 병이라도 걸린 것인지 몸 하나는 튼튼하고 고왔던 순옥의 몸 움직임이 사뭇 굼떠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마에 하염없이 구술 땀을 흘리면서 산길을 오르내리는데 유난히 힘겨워 했고, 안색도 유독 창백하고 핏기가 없어, 마치 산정에 덮여 있는 설상(雪霜)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경성부사 정웅진에게는 마름 일을 보고 있는 박웅기(朴雄基)라는 인물이 있었다. 아니, 마름 일은 전에 정(鄭) 부사의 향촌에서 하던 일이고, 지금은 부사 일가족의 집사(執事)로 일을 하고 있는 인물이다. 부사와는 고향인 경기도 안성(安城)의 먼 인척사이인 데다 성격이 자로 잰 듯 꼼꼼한 박웅기는, 정웅진 부사의 가정사(家庭事)를 비롯, 모든 사사로운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는 충복이다. 그는 부사의 사적(私的) 대소사를 감당하는 한편, 관아의 기생과 노복들을 감독하는 관노청을 관장하고 있었고, 특히 마님을 대신해서 안채에서 일하는 하녀들을 감시하며 그들의 상전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날도 새벽녘에 노복들의 누거(陋居)인 산채 외곽 고방(庫房)에서 쪽 잠을 자다가 뭔가 두런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져 눈을 뜬 창분은, 아직 한밤중인 데도 고방 옆 한데에서 뭔가 들려오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귀에 익어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박웅기 아재비가 순옥에게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님께서 네 몸에 태기가 있는 것을 벌써 아시고 어찌해야 할지 몹시 걱정을 하고 계셨는데, 어제 밤 늦게 분부를 내리셨다. 물론 부사 영감께서는 네가 아이를 가진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계시는 것 같았다.”

 

“네? 마님께서 알고 계신다고요? 그럼 저는 어찌 되는 건가요? 아재비,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말씀 좀 해주세요––.”

 

순옥이 평소와는 다르게 다급한 목소리로 박웅기에게 매달린다.

 

“마님께서는 네가 다른 곳에 가 있기를 바라고 계신다. 아무래도 조용한 곳에서 몸을 풀다가 아이를 낳아야 하지 않겠냐는 말씀이셨어!”

 

순옥이 당황했던지 박웅기의 얼굴만 쳐다보며 말을 잇지 못한다.

잠시 머뭇거리며 뜸을 드리던 박웅기는

 

“만일 부사 영감께서 네 임신 사실을 아시기라도 하는 날이면, 아마도 너를 당장 내쫓아버리라고 불호령을 내리실 거야. 안 그러냐! 도호부의 부사라는 지체 높은 양반이 주변에 있는 온전한 여자 다 놔두고 하필 너 같은 어린 노비를 건드려 아이를 가졌다고 소문이라도 나봐라. 부사 영감 체면이 뭐가 되겠냐! 그래도 마님께서 너를 생각해서 은거할 처소를 마련하라시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