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끝없는 여정"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11

추동 2020. 8. 24. 08:49

창분에게는 눈골마을 사람들의 호구지책을 해결해야 할 책무가 주어졌다.

 

짐승보다 못한 종살이가 너무도 지겹고 서러워, 차라리 이 풍진세상을 하직하고 신분차별 없는 무등(無等)의 지대로 들어와 사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호사려니 생각하고 개마고원 험산준령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과연 이런 험산에서 무얼 먹고 살아야 할지를 미쳐 따져보지도 못한 채, ‘그저 뭘 해먹든 입에 풀칠이야 하지 않겠나’ 라는 막연한 가망을 품고 들어온 게 이들 마을사람들 모두의 속사정일 것이다.

 

물론 산촌마을 눈골로 들어오면서 얼마간의 먹을 거리를 짊어지고 들어오긴 했지만 그걸로 내년 봄 수확 때까지 견딘다는 건 어림도 없는 망상이어서, 정작 엄동설한의 길고 긴 겨울을 어찌 보내야 할지를 생각하면 몸이 오싹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질 뿐이다.

그렇다고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본 들 반겨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달리 뾰족한 호구지책이 있을 리도 만무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수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허상이 되고 만 것이다. 어쨌거나 각고 끝에 이곳까지 왔으니 어떻게든 살아가긴 해야 할 텐데, 그러자면 이곳을 처음 개간했던 화전민들의 생존방식을 따라, 때에 따라서는 초근목피로 연명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고, 마을사람 모두가 이를 피해 갈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마을사람 각자가 혼자만 살겠다며 제각기 움직였다 가는 종국에 가서는 뿔뿔이 흐트러지게 될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어차피 생사고락을 같이 할 수밖에 없다는 연대의식이 강고해지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힘을 합쳐 공동으로 농작물을 심고 거두지 않으면 마을사람 모두가 먹고 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눈골마을 식구 대부분은 농사를 지어본 경험은 별로 없었지만, 종살이하는 자신의 신세가 밑바닥에서 짐승처럼 일하지 않으면 필경은 죽어 나갈 수밖에 없는 팔자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위에서 어떤 혹독한 하명이 떨어지더라도 불평 한번 못하고 죽기 살기로 부딪치며 견뎌내는 게 몸에 밴 사람들인지라, 눈골마을이 제아무리 험준한 동토의 오지산악 일 지라도 산중 농사일을 너끈히 이겨낼 기세는 충분히 지닌 사람들임엔 틀림이 없었다.

 

우선 마을사람들의 호구를 해결하려면, 무엇보다도 감자나 밀, 혹은 보리를 심어 식량을 확보하는 게 가장 시급한 일일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잘라낸 통나무를 묵혀 버섯을 재배해야 하고, 산지에 널려 있는 약초를 채취하여 돈을 만드는 일일 것이다. 말하자면 밀과 보리를 경작하여 내년 봄부터 먹을 양식을 미리 확보해야 하고, 버섯과 약초를 수확하여 겨울 먹거리와 농사비용을 포함한 생계비를 마련해야 하는 일이었다.

 

특히 큰 이득이 될 수 있는 송이버섯 재배와 채취는 남성의 강단과 여성의 섬세함이 함께 어우러져야 수확이 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경작은 마을사람들이 빠짐없이 한데 뭉쳐 달라붙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합심해서 공동작업을 펼쳐 나가자면, 누군가 마을사람들 앞에 나서서 그들을 통솔하고 이끌어 나갈 선도자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을사람들 모두에게 작업 일과를 골고루 배정하고 작업과정을 독려하는 것은 물론, 땀 흘려 걷어들인 수확물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일이야 말로 마을사람들 모두를 하나로 묶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므로, 마을을 이끌어 나갈 선도자가 절실하게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런 역할을 감당하려면 주민들 모두에게 절대적 믿음과 호응을 받을 수 있는 꼼꼼하면서도 적극적인 성품을 지닌 사람이 필요했는데, 이를 감당할 적격자는 오로지 창분(彰芬) 한 사람밖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마을사람들 모두의 뜻이 모아져 창분이 눈골마을을 이끌어 나갈 선도자로 뽑히게 된다. 비록 이십여 명에 불과한 작은 집단이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가 혼신을 다해 펼쳐 나가야 할 고랭지 농경작업과, 이문을 남겨야 하는 농산물 장거래(場去來) 활동, 그리고 이런 활동을 통해 마을사람들이 행복하고 여유로운 자조(自助)의 마을을 만들어 나갈 지도자에 창분이 뽑힌 것이다.

 

버려진 땅 고산준령의 개마고원에서 노비 신분의 하찮은 여인 창분(彰芬)의 인생행로를 획기적으로 바꿔 놓을 끝없는 여정이 지금 막 출발하려는 것이다. 물론 그녀의 뒤에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처럼 묵묵히 헌신해줄 그녀의 천생배필 장한식(張漢植)이 있었다.

 

마침 회령(會寧)이 고향인 한식(漢植)이 외지로 나오기 전, 집안에서 겨울철 농사일을 거들어본 적이 있어, 보리와 밀의 경작 방법에 관해 짧게나마 경험이 있었기에 천만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식과 창분은 우선 고산준령에서 지을 수 있는 고랭지 농사법을 채득하기 위해 급히 산을 내려가, 대덕산과 가까운 산남면(山南面) 주변의 전답(田畓) 밀집지역으로 달려갔다. 한식(漢植)과 창분(彰芬) 부부는, 농사를 천하의 근본으로 신봉하고 있는 조선땅에서 농경에 전념해온 농민을 찾아 농사법을 채득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경험 많은 농부를 만나기 위해 이리저리 헤맨 끝에, 산남 변방에서 오래도록 농사를 지어온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인자하게 생기신 이씨(李氏) 성을 가진 어르신 한 분을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