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조의 추억

일조의 추억, 취흥여행(醉興旅行)-2

추동 2021. 12. 7. 18:30

술은 "백약 중 으뜸"이라는 말과 함께, 적당히 즐겁게 마시면 어떤 약 보다도 좋다는 정신의학자의 진단도 있기는 하지만, 문제는 "적당한 선"을 지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점이다. 술에 취해 즐거움에 젖어 있는 시간보다는 술에서 깬 뒤 느끼는 후회와 고통의 시간이 확연히 길다는 점은, 삶의 이치와도 일맥상통하여, 결국 왜 술을 마시느냐는 질문은 왜 살아가느냐고 묻는 것과 매한가지인 듯싶다.

 

결국 술에 취하는 것은 그 자체로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러나 술 꾼들은 깊은 시름에 빠지면 자신도 모르게 주우(酒友)를 찾거나 자신을 반겨주는 단골 술집으로 향하게 마련이다. 요즘 같은 각박한 세상에서 가장 안심하고 심경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은 바로 술의 세계라 믿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첫 음주 경험은 집안 어른의 술 심부름 중에 시작된 경우가 많다. 어린 시절 심부름을 하면서 찰랑거리는 막걸리를 흘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흘러내리는 막걸리가 아까워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한 두 번씩 얼굴을 찡그리며 홀짝거리다가, 몸을 후끈 달구어 주는 술의 힘을 알게 되면서 술의 세상에 입문하게 된 경우다. 성인이 되어 술꾼의 전성기를 맞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술 심부름 덕택에 술꾼에 이르렀다고 실토한다. 물론 나는 술 심부름을 해볼 기회가 전혀 없어 이 경우에 해당되지는 않는다.

 

나는 술 세계의 기막힌 묘미를 전혀 모르고 지내오다가, ROTC 초급장교로 군에 임관하면서 처음 술의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군대생활에서 빠져서는 안 될 필수 동반자가 술이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정훈 장교였던 나는, 부대 내에서 대주가(大酒家)로 이름을 떨쳤던 상사인 정훈참모의 술 상대역을 전담하게 되면서 술 세계로 입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의 직책이 바로 그 분의 보좌관이었기 때문이다.

 

일과가 끝나 퇴근하는 시간이면 영락없이 그분과 동행할 수밖에 없었고, 그분의 단골집 순례가 반복되었다. 물론 초기에는 술친구 아닌, 강요된 술 파트너였을 뿐이긴 했지만, 군대의 수직적 위계 때문에 항상 초긴장 상태에서 그분의 일방적 무용담(?)을 꼿꼿한 자세로 들으면서 한잔 두 잔 마시다 보니 급격히 술 실력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덕분에 일년쯤 후 주당 스승인 그분이 다른 부대로 전출할 즈음에는 나도 이미 독자적 술꾼이 되어 있었다. 평생 담배는 피워보지 못했지만, 이 때부터 나의 취흥여행(醉興旅行)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