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의 아침, 광화문이 열리다

중국사신 공식 환영연–하마연(下馬宴)

추동 2019. 11. 27. 06:14


(사진-40) 경회루에서 벌어지는 중국 사신을 위한 연회는 조선이

지니고 있는 예술과 음식문화를 망라하여 보여주었다.





●중국사신 공식 환영연하마연(下馬宴) 


중국 사신이 입경한 다음날 오후 사신일행을 위해 임금이 베푸는 대대적인 하마연 연향이 벌어진다. 근정전 앞 상월대 위에는 차일이 쳐진 가운데 임금과 왕족 그리고 중국 칙사 등이 자리에 앉아 임금이 내리는 어주(御酒)와 위무를 받으며 고무되어 있고, 조정 마당에는 품계석에 따라 문무 대신들이 좌정하여 중국 관원들과 주연을 나누며 긴장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다.


 


정전 앞 하월대 좌우에는 장악원(掌樂院) 소속 악사들이 자리하여 궁중음악을 연주하고, 답도 앞에 마련된 무대 위에서는 역시 장악원 소속의 기생들이 춤과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우고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러한 연향(宴饗)은 조선 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여러 시책들에 대해 중국 정부의 승인을 따내기 위한 외교적 교섭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자리이기도 하였다. 연회를 베풀어 조선의 입장을 전달하고 사신의 협조를 요청하기도 하며, 주변국과의 분쟁에 대해 자문을 구하고, 황제에게 간언하여 조선의 입장을 수용해 주도록 요청하기도 한다. 특히 이런 연회를 통해 상대국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잔치가 무르익어 가면서 해가 떨어져 어두워지자 임금은 사신 등과 함께 근정문(勤政門) 앞으로 자리를 이동하여 영제교(永濟橋) 상공을 바라보며 자리에 착석한다. 군기감(軍器監)에서 펼치는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서다.


 


고려 때 최무선(崔茂宣)에 의해 화약기술이 크게 발달하였고, 그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이 이를 조선에 전수시키면서 신기전(神機箭) 등 뛰어난 신 화약 병기들이 개발되어 군사력이 크게 보강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큰 전쟁이 발생하지 않아 화약기술이 불꽃놀이로도 발전하였다.


 


조선의 불꽃놀이는 화염이 치솟아 섬광을 일으키며 하늘을 가르고 우레와 같은 폭음이 궁궐전체를 압도할 정도로 위력이 대단하여, 화약무기에 대해 최고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중국의 사신들도 조선의 불꽃놀이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기색이 역역하다. 세종 때는 이미 중국의 화약기술과 화약무기의 수준을 조선이 월등하게 앞지르고 있었던 때이다.


 


불꽃놀이의 황홀경이 끝난 임금과 사신일행은 하마연(下馬宴)이 계속되는 경회루(慶會樓)를 향해 자리를 옮긴다. 담장과 버드나무로 에워싸여 내부가 들여다보이지 않는 경회루는 12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연회장으로, 황제를 대리하여 입궐한 중국사신을 위해 이미 만반의 하마연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다.                                                                  


 


경회루 북쪽의 만시문(萬始門) 밖에는 190여 칸의 임시 숙설소(熟設所)가 가설되어 있고, 1백여 명의 대령숙수(待令熟手)에 의해 산해진미의 궁중음식이 마련되었으며, 임금은 물론 손님상에는 고임음식과 진어(進御)음식이 가득하여 미각을 진동시켰다. 역시 장악원 악사들의 연주와 노래 그리고 춤이 가을밤의 경회루를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였다.


 


중국 사신단 일행은 질펀한 접대 속에 한 달 가량을 머물다가 막대한 조공품과 물품을 운반하는 조선인 2천여 명과 함께 한양을 떠나갔다. 임금은 돈의문 밖 모화관(慕華館)까지, 정승 판서들은 고양(高陽)의 벽제관(碧蹄館)까지 배웅을 나가야 했다. 이렇게 궁궐의 최고 행사는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