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지성과 사랑)
<저자소개-헤르만 헷세>
1877년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의 칼프에서 태어나 목사인 아버지와 신학계 집안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892년 마울브론 수도원 학교를 입학했으나 기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인이 되기 위해 도망쳐 나왔다. 그 후 서점의 견습사원이 되면서부터 독서에 몰두하며 문학수업을 쌓았다. 이십 대 초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899년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한 헤세의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와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간』이 출간됐다. 특히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인정을 받았으며, 문단에서도 헤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1904년 장편 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통해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으며 문학적 지위가 확고해졌다. 1906년 헤세의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를 출간했고, 1919년 자기 인식 과정을 고찰한 작품 『데미안』과 『동화』 『차라투스트라의 귀환』을 출간했다. 서른 세 살이 되는 해 인도 여행을 감행하고 이 경험을 토대로 1922년 『싯다르타』를 출간한다. 1946년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과 괴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책의 특징>
어쩌면 모든 정신과 예술의 뿌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덧없이 사라져가는 것 앞에서 슬픔에 빠진다. 그럴 때면 우리 자신의 가슴속에서도 우리 역시 덧없이 스러질 것이며 조만간 시들 것이라고 느껴진다. 학식이 높고 차가운 성격의 나르치스와 밝고 감성적인 골드문트는 수도원에서 금세 친구가 된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내면에 자리한 감성의 비범함을 알아챈다. 그는 골드문트가 수도원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임을 직감한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골드문트는 우연히 만난 여자와의 하룻밤으로 사랑의 쾌락을 알게 된다.
이후 골드문트의 인생은 극적인 도약과 급작스러운 허무의 연속. 수도원을 뛰쳐나와 떠돌아다니며 육욕과 죽음, 허무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가까스로 만난 사랑의 뒤에 오는 이별의 고통은 그의 인생 전반을 불안하게 뒤흔든다. 대지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아 방랑자를 자처하지만, 흑사병 앞에서 인간의 악성을 처절히 목도하고 죽음의 근린을 자각하기도 한다. 방랑을 거듭할 수록 그에겐 삶의 덧없음이 켜켜이 마음에 내려앉을 뿐이다. 그리고 예술이, 유한을 뛰어넘는 영원의 통로로써 그에게 다가온다.
골드문트는 사랑했던 이들을 조각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동시에, 그들과 그 자신의 세상에 기억되기 위해서다. 극적으로 나르치스와 재회한 후, 그는 수도원에서 조각에 몰두한다. 나르치스는 친구의 조각 앞에서 더없이 숙연해진다. 자신이 고집했던 진리에의 길이 예술을 통해서도 다다를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친구의 마지막 방랑과 죽음을 지키며, 나르치스는 자신이 골드문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닫는다.
<책 속으로>
한 줄로 책을 요약하자면 ‘지성과 감성을 대표하는 두 친구가 삶을 살아가며 배우게 되는 서로 다른 인생론’이라 할 수 있겠다.
나르치스가 성직자의 삶을 선택해 세상 유혹에서 분리된 비교적 안정된 인생길을 걸었다면, 골드문트는 예술가의 삶을 택해 온갖 방황과 모험을 자초하게 된다. 둘 사이의 간극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다. 똑똑한 나르치스는 첫눈에 골드문트가 성직자로 사는 삶에 맞지 않음을 그보다도 더 먼저 간파하고, 골드문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의 길을 걷도록 충고한다.
수도원 문 밖을 도망쳐 나오면서 골드문트의 삶은 그 때부터 온갖 고통과 방황 그리고 갈등으로 점철된 길을 걷게 된다. 물론 여자와 나누는 육체적 쾌락과 욕정의 분출은 그에게 일시적이나마 삶의 달콤함을 선사한다. 여성과의 사랑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느끼게 될 인간애의 순수성을 키우고, 모든 사물을 대함에 있어 깊은 영혼의 우물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질을 갖추게 해 주고, 종국에는 예술을 향한 긍정적인 토대로 발전한다.
골드문트의 여성 편력이 세기의 난봉꾼을 장식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이 책은 세계 고전문학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대중 로맨스 소설에 그쳤을 것이다. 탕자의 생활이야 말로 진정한 성자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첩경이 될 수 있다고 골드문트 자신도 어느 정도 예측했을까? 성자의 길은 아니지만, 골드문트는 여성 편력을 거쳐 예술가로서의 삶으로 인도된다. 살인과 처형 직전까지 몰리는 험하고 고된 생활을 겪으면서 길러진 내면의 탄탄한 감수성은 순수한 창조의 열정으로 옮겨진다.
오래 전부터 골드문트의 예술가적 기질을 예측했던 나르치스는 훌륭한 예술가로 성장한 친구를 만나 감동하게 된다. 비록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나르치스는 친구의 삶에서도 공통된 합일점을 발견한다.
“우리 같은 사상가들은 하느님의 존재에서 세속적인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하느님에게 다가가려고 애쓰지. 그런데 자네는 하느님의 피조물을 사랑하고 재창조함으로써 하느님에게 다가간다는 말일세!”
나르치스의 말은 구도자적 삶에 후한 점수를 주는 우리 자신에게 반추해 볼 만하다. 계율을 따르며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사는 것만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일일까? 골드문트가 예술 세계와 인간을 통한 희로애락을 철저히 경험하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피조물을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머리로 차갑게 지키는 냉정한 계율이 있다면, 온몸으로 전율하며 배우게 되는 뜨거운 계율도 있는 것이다. 둘의 차이가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에 골드문트는 죽음을 맞이하며 이런 말을 나르치스에게 남겼다.
“자네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작정인가? 자네한테는 어머니도 없잖아? 어머니가 없이는 사랑할 수 없는 법일세. 어머니가 안 계시면 죽을 수도 없어.”
여기서 ‘어머니’란 무엇을 상징할까? 자연인 골드문트가 살을 부대끼며 지나온 대지와 자연 같은 그 근원적인 것을 뜻하는 것 같긴 하다. 분명한 건 골드문트는 죽음 앞에서 초연해졌다. ‘어머니’라고 상징되는 그 무엇을 소유했기에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다.
성직자 나르치스보다 더 초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담대함은 골드문트만이 가진 귀한 인생 자산이다. 한바탕 연회와도 같은 일생을 마치면서 후회할 것 없는 인생을 살고 난 현자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일까? 그렇다면 원 없이 자기의 기질과 천성을 살려, 자신이 추구하고 싶은 대로 맘껏 삶을 누릴 수 있었던 자만이 삶을 후회 없이 담담히 마감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는 것인가? 거친 인생을 담보로 하지 않고는 얻기 힘들기에 그 가치가 빛난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죽어가는 친구를 보며 나르치스는 당혹감에 빠진다. 소설은 여기서 막을 내리고 그 후의 이야기를 전하지 않는데, 소설이 끝나자 헤세가 생각을 강요해 온다. 당신이 나르치스라면 골드문트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고.
<결언>
헤세의 인생관은 골드문트의 자연인 같은 삶의 과정이 죽음의 두려움과 모든 인생사의 걱정을 떨쳐버릴 수 있는 해탈의 상태에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한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이 소설은 자신의 성장기 체험과도 같은 소설이라고 한다. 완전하지 않은 한 인간이 삶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 성장해 가고 자기 자신을 구현해 나가는가를 작가 헤세는 자기 삶의 체험으로 보여줬다고 봐도 괜찮을 것 같다.
'일조의 독서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조의 독서일기-당신이 옳다. (0) | 2019.11.23 |
---|---|
일조의 독서일기-다산(茶山)의 마지막 공부 (0) | 2019.11.17 |
일조의 독서일기-그들은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되었는가-2 (0) | 2019.11.03 |
일조의 독서일기-그들은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되었는가-1 (0) | 2019.11.01 |
일조의 독서일기-82년생 김지영 (0) | 2019.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