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의 아침, 광화문이 열리다

궁궐의 아침, 광화문이 열리다(제9회)

추동 2019. 8. 8. 16:45


(사진-8) 경복궁 완공 축하연환관 김사행에 의해 설계, 시공된 경복궁은

                                               공사 착수 10개월만인 1395 9월 말에 완공되어 위용을 드러냈다.




(3) 창건 주역–3, 천재 건축 장인 김사행(金師幸)


 경복궁에서 만나는 아름답고 수려한 건물들을 최초로 설계(設計)하고 시공(施工)한 사람은 뜻밖에도 천민출신의 내시 김사행이라는 인물이다경기도 어느 관아의 관노비 아들로 태어난 김사행은 10살을 넘긴 시기에 중국 원()나라의 조공 요구에 따라 환관으로 차출되어 거세(去勢)한 후 원나라 황실의 내시가 되었다. 처음 김사행은 원나라 황실의 전연사(典涓司–궁궐을 수리 보수하거나 청소하는 기관)에 배치되어 공사(工事) 심부름을 하며 성장하다가 차츰 전각을 수리하거나 황궁 내 토목공사에 참여하게 되면서 건축공사에 대해 비범한 재주를 보이는 건축 기술자로 성장하였다.


 


환관 김사행은 당시 원나라 황실의 공주였던 노국공주를 보살피며 수발하는 일을 병행하였는데, 마침 노국공주가 고려의 공민왕과 결혼하면서 고려로 돌아오게 되자 김사행 역시 함께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 공민왕의 신임으로 환관들의 최고위직인 판 내시부사에 발탁된 김사행은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손발이 되어 왕실을 이끄는 집사장으로 활동한다.


 


특히 독실한 불교도인 김사행은 고려왕실에서 추진하는 대규모 왕실전용 사찰(寺刹)공사를 전담하였는데, 이때 궁궐 전각과 대형 사찰을 조합한 특유의 건축기법을 개발하였고, 이것이 조선왕조로 이어져 궁궐 건축의 표본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사행은 노국공주와 공민왕이 세상을 떠나자 경기도 개풍군에 쌍릉(雙陵)인 공민왕의 현릉(玄陵)과 노국공주의 정릉(正陵)을 조영하는 대역사를 직접 전담하였는데, 이후 김사행의 공민왕 현릉과 노국공주 정릉이 조선왕릉을 조영(造塋)하는 표준기술로 이어졌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세계적인 이목을 받고 있는 조선왕릉은 결국 김사행의 솜씨가 계승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김사행은 정도전의 천거로 태조 이성계에게 발탁되어 계속 조정에 남아서 건축과 토목공사를 주도하게 되었고, 경복궁을 창건하는데 있어 김사행을 능가하는 장인(匠人)은 조선 천지에 찾아볼 수 없게 되자 자연 그가 발탁되어 경복궁을 설계(設計)하게 되었으며, 그의 시공(施工)으로 경복궁은 창건될 수 있었다.




물론 최초의 경복궁은 소실되어 없어졌지만, 이후의 복원공사가 원래의 설계도(임진왜란 이전에 그려진 경복궁 전도)에 의해 중건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근정전ㆍ사정전ㆍ강녕전 등은 환관 김사행의 솜씨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창건 주역들의 말로(末路)


 정도전의 국정설계에 반기를 든 사람은 이성계의 5남 이방원(후에 태종)이었으니, 역사적으로 권력의 2인자는 존재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경복궁의 주인인 아버지 이성계를 몰아냈고, 경복궁의 다음 주인으로 책봉되었던 이복동생인 왕세자 의안대군(이방석)을 살해하였으며, 경복궁을 세운 정도전과 그의 추종 인물인 건축 설계사 김사행 등 경복궁 창건의 주역들을 모조리 참살하고 정도전의 궁궐이라 일컬어지는 경복궁을 폐쇄해 버린다.


 


태종은 정적(政敵)의 궁궐인 경복궁을 대신할 창덕궁(昌德宮)을 새로이 창건하였는데, 궁궐의 건설 책임자는 아이러니 하게도 태종에게 죽음을 당한 내시 김사행의 수제자인 또 다른 내시 박자청(朴子靑) 이었다. 건축과 토목기술을 김사행에게 전수받은 박자청은 스승인 김사행이 태종에게 죽음을 당하자 궁궐 건축의 독보적 존재로 부상하였고, 궁궐(창덕궁)을 지어야 하는 태종에게 박자청은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 되었다. 박자청은 내시의 신분임에도 태종의 심복이 되어 육조(六曹)의 하나인 공조(工曹)의 판서(지금의 장관급)올라 큰 영화를 누리는 입지전적인 인물이 된다.


 


경복궁 건설의 전설적 현장 감독 심덕부는 왕자의 난에도 용케 생명을 부지하였는데, 그의 아들 심온(沈溫)이 큰딸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를 태종의 셋째 아들 세종에게 시집보내고 승승장구하며 영의정에 오르는 등 왕실의 외척으로서 가문이 크게 성공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심덕부와 심온 부자의 가문이 정도전의 일파였음을 잊지 않고 있다가, 외척을 배격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심온을 사사(賜死)하고 그의 가문을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지경으로 몰아붙인다.


 


경복궁 창건의 주역인 정도전, 심덕부, 김사행 등을 포함한 관련 인물들은 결국 반() 경복궁 세력인 이방원(태종) 일파에 의해 모조리 죽임을 당하면서 짧은 경복궁 시대는 속절없이 끝이 나고, 15대 광해군 이후 새롭게 축조된 동궐(東闕) 창덕궁(昌德宮)”서궐(西闕) 경희궁(慶熙宮)” 시대가 길게 열리게 된다.


 


조선이 개창되면서 왕조의 법궁으로서 거대하게 자태를 뽐내던 경복궁은 세종 재위 8년부터 시작하여 불과 25년 여의 짧은 전성기를 보내고는 결국 다른 궁궐들에게 법궁의 지위를 빼앗긴 채 지리멸렬하다가 임진왜란으로 인해 그 흔적조차 사라져 버린다. 오히려 당시보다는 현대에 와서 역사적 법궁으로서 대접을 받고 있으니 그나마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