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11) 임금의 비밀이 숨겨진 곳, 침전 강녕전
(다) 침전(寢殿)-강녕전(康寧殿)
“평안하게 쉬는 곳” 이라는 뜻을 지닌 강녕전은 연조(燕朝)의 으뜸전각으로 임금의 정침이자 개인 생활공간이다. 오복(五福)은 수(壽), 복(福),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등 다섯 가지를 말하는데, 이중 강녕을 얻으면 나머지 오복을 다 차지할 수 있다고 믿어 전각 이름을 강녕전이라 했다.
강녕전은 철저히 감추어진 어둠의 공간이기 때문에 젊은 남성인 임금이 특별히 자기관리를 혹독하게 해야 하는 인고(忍苦)의 장소이기도 했다. 임금이 욕망을 이기지 못하여 방종하면 정사(政事)는 어지러워지고 백성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임금 자신은 건강에 치명타를 입어 생명을 단축하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 때에도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해야 군주의 위상이 세워지고,
또한 오복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조선 임금은 대체적으로 주간(晝間)의 사정전에서는 반듯하고 엄격하였으나, 야간(夜間)의 강녕전에서는 욕망을 이기지 못한 채 방종하여 대부분 짧은 생애를 마쳐야 했다.
처음 완공된 경복궁에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은 없었고, 강녕전에 임금 부부가 함께 거처했는데, 다만 대청마루의 동쪽 방(동 온돌)은 임금의 침전이었고 서쪽 방(서 온돌)은 왕비의 침전이었다. 조선초기에는 임금과 왕비의 거처가 한 건물 내에 있었던 것이다.
임금과 왕비의 침전이 분리된 것은, 창덕궁에서 함께 생활하던 태종과 원경왕후가 극심하게 부부 갈등을 빚었은데, 이를 보며 자란 세종이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왕비가 머물 중궁전(교태전)을 새로 만들었고, 이때부터 임금의 침전과 왕비의 침전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강녕전의 첫 번째 주인이야기
강녕전의 첫 번째 주인은 조선 창업 임금 이성계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이며 조선왕조의 첫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다. 전쟁터에서 젊음을 보내면서 거칠게만 살아온 이성계는 37살의 때늦은 나이에 가슴 뭉클한 첫사랑의 여인을 만났으니 그 여인이 바로 신덕왕후 강씨였다.
태조 이성계는 17세 때 함경도 안변에 사는 2살 아래인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39년의 세월을 부부로 살면서 6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어린 시절 함흥의 산악지대에서 무술을 연마하며 성장한 이성계는 활 솜씨가 뛰어나 신궁(神弓)으로 평판이 높았다.
25세 때 아버지 이자춘이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지위를 승계하였고, 2년 후에는 고려의 국경지대를 경계하는 동북면 병마사에 올랐으며, 이후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승승장구하며 고려의 신흥무장으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고, 곧이어 중앙정계인 개성으로 진출하게 된다.
어느 날, 이성계는 사냥을 하려고 말을 타고 황해도 곡산의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갈증을 느껴 우물을 찾아 말에서 내리게 되었다. 마침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는 젊은 여인이 있어 물을 달라고 청했는데, 그녀는 물을 한 바가지 떠서 그 위에 버들잎을 띄워 남자 에게 내밀었다. 사내가 뭐 하는 짓이냐고 의아해하자 여인은 웃으며 “물을 급하게 마시면 체할 수도 있으니 천천히 마시라는 뜻”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사내는 여인의 섬세한 배려에 탄복했고 그녀의 모습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얼마 후 이성계의 청혼으로 그들은 결혼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때 그녀는 16세의 처녀였고, 이성계는 그녀보다 21살이나 많은 37살이었다. 그녀가 바로 신덕왕후 강씨였다. 강씨는 고려 말 격동기 때는 이성계의 정치적 자문역을 맡았고, 조선을 건국한 후 현비에 봉해진 뒤에는 내조에 힘써 태조가 새벽 일찍 옷을 입을 때 시간을 재가며 늦지 않게 살피고, 정사에 바빠 늦게 식사를 할 때면 음식이 식지 않도록 품고 있다가 따뜻한 식사를 대접하고, 정사를 보러 나가면 궁인들을 거느리고 배웅하고 해가 저물면 등불을 들고 기다리는 등 온몸으로 내조에 열중하였다.
이성계는 함흥에 있는 첫째 부인 한씨에게서는 전혀 받아보지 못했던 지극하고 따뜻한 정성에 깊이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강씨는 친정집안의 탄탄한 인맥을 배경으로 이성계가 고려 귀족사회로 진입하는 통로를 마련했고, 그녀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 덕에 이성계는 단번에 고려 귀족사회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전실부인 한씨가 낳은 아들들을 개성으로 불러들여 성균관에서 공부시켰으며 장성하면 개성의 명문귀족들의 여식과 결혼을 시켜 사돈을 맺었다. 또 자신의 첫째 아들 방번을 공양왕의 사위로 만들 정도로 그녀의 활동능력은 탁월했다. 그녀는 이성계라는 한 남자의 삶에 있어서나 조선 건국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존재였다.
이성계는 신덕왕후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무조건적으로 따랐다. 신덕왕후가 보여준 정성 어린 내조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부인인 한씨에게 태어난 장성한 여섯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씨의 소생인 어린 방석을 세자로 삼은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이러한 신덕왕후에 대한 이성계의 지극한 사랑이, 지금까지 자신이 세운 금자탑을 송두리 채 무너트려 파탄을 몰고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핏줄이 조선의 왕통을 이어나가길 원했다. 태조와 대신들이 세자를 정할 당시 이미 장성한 한씨의 아들 중에서 세자를 정해야 한다는 신료들의 이야기를 엿들은 강씨가 문밖에서 대성통곡을 하자, 이성계는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신덕왕후 강씨의 둘째 아들 방석을 세자에 책봉했다. 이때 방석의 나이는 11세였고, 방원은 혈기왕성한 26세의 중후한 청년이었다.
태조가 위화도 회군을 했을 당시 죽음의 위험에 빠진 신덕왕후와 그 아들, 딸을 보호하여 생명을 구한 사람은 이방원이었지만, 자신이 낳은 아들을 위해 냉담해진 신덕왕후는 자신을 끔찍하게 따르던 방원을 가차없이 버렸다. 게다가 방원의 정치적 생명을 끊기 위해 그를 개국공신 명단에서 누락시켰고, 방원이 휘하에 거느리고 있던 사병(私兵)을 몰수하였다. 방원이 신덕왕후에게 극심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교육시키고 장가까지 보내준 신덕왕후가 자신의 배로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자신을 배척한 순간 왕후는 더 이상 방원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조선왕조가 개창한 지 막 4년이 지난 1396년 8월, 마흔 하나에 불과했던 신덕왕후는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2년 뒤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태조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신덕왕후 소생인 방번과 방석, 경순공주의 남편 이제를 모조리 죽였다. 경순공주는 이후 비구니가 되었고, 신덕왕후 강씨의 친족도 멸문을 면치 못했다.
신덕왕후는 후일 태종이 되는 이방원에 의해 왕후가 아닌 첩의 위치로 전락하였고, 공식적인 사료나 기록에서도 모두 삭제되었다. 지금의 덕수궁 자리에 있었던 그녀의 무덤 정릉은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다가 결국 도성 밖 정릉동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태조 이성계의 신덕왕후에 대한 무조건적인 편집적 사랑은 냉철했던 그의 정상적 판단을 흐리게 하였고, 이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파국이 일어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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