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의 아침, 광화문이 열리다

궁궐의 아침, 광화문이 열리다(제10회)

추동 2019. 8. 8. 16:48


(사진-9) 근정전(勤政殿)⇒조선 정궁의 대표 전각인 근정전은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근엄함이 배어 있다. 하늘을 상징하는 지붕은 원형을 이루고, 땅을 상징하는

기단은 방형을 이루고있다. 군신간에 충성과 신임을 확약하는 전당이다.



9. 염원(念願)을 담은 전각들의 사연


경복궁 경내의 전각은 사용하는 사람과 용도에 따라 대략 8개의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임금의 전용공간


 나라의 주인인 임금의 내외전에는 정전-근정전, 편전-사정전(부속전각-만춘전천추전), 침전-강령전(부속전각-연생전경성전연길당응지당), 그리고 연향공간-경회루가 있다.



 () 정전(正殿)근정전(勤政殿)


 전국 산하(山河)의 모든 정기(精氣)가 하나로 모이는 곳, 한반도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국가의 핵심곡점(核心曲點), 권력과 권위의 꼭지점, 곧 국왕의 생명과 국가의 기틀을 상징하는 이곳이 바로 근정전이다. 이곳에서 국가의 모든 정치와 종교가 시작되고, 또한 임금의 존영이 빛을 내며 우뚝 서는 곳이다. 그래서 경복궁을 법궁(法宮)이라 일컫고, 근정전을 법전(法殿)이라 부른다.




근정전은 군신(君臣)이 하나 되는 소통의 장소이며, 충성과 신임을 주고받는 약속의 광장이다. 이곳 근정전은 매달 4~5차례씩 임금과 신하가 함께 모여, 신하들은 임금께 충성을 맹세하고, 임금은 신하들에게 무한의 신뢰를 표시하며, 군신이 서로 한 마음이 되어 오로지 나라와 백성의 태평성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자고 다짐하는 광장이다. 왕조시대에 있어 임금의 권위를 드높이고, 신하들의 사기를 앙양하는 의식은 국가 전도를 위해 지극히 중대한 일이며, 이 행사를 위해 근정전이 존립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도전이 이름을 지은 근정전은 “임금이 근면한 자세로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고, 또한 근정전 남행각 동편에 부착된 14개의 주련(柱聯)에는 나라가 태평성대를 이루고, 공명정대한 위민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군주와 신하 및 백성이 행해야 할 도리, 그리고 궁궐의 역할과 의미등이 근정전의 정신적 상징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근정전 일곽에 부착된 편액과 주련을 통해 근정전의 역할과 존립 배경을 확실하게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 편전(便殿)-사정전(思政殿)


천하의 이치는 깊이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이 없으면 잃을 수밖에 없다.”는 뜻을 지닌 사정전은, 임금이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에 퇴근할 때까지 머물면서 어전회의를 비롯한 최고 통치자로서의 모든 공식 업무를 처리하는 임금의 집무실이다.




사정전은 임금이 정무를 보는 일상업무는 물론, 임금과 각급 신료들이 국정 현안에 대해


격렬히 토론하는 격론장(激論場)이기도 하였는데, 토론은 주로 사정전 좌우에 위치한 만춘전과 천추전에서 이루어졌다. 사정전은 마루방이지만 만춘전과 천추전은 각각 마루방과 온돌방이 함께 있어 편리하였으며, 밤 늦게까지 열띤 토론을 통해 결론을 얻어내기에 제격이었다.


 


사정전은 사방이 벽체가 없이 창호로 둘러 쌓여 있고, 내부의 소리가 여과 없이 밖으로 전해지는 열린 공간의 형태로 되어있어, 조금도 숨겨짐이 없이 공명정대하게 정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흔히 조선시대의 정치를 떠올릴 때 상대 당()을 인정하지 않는 붕당정치(朋黨政治)와 당파싸움을 기억하지만, 조선왕조의 정치 원리는 소수에 의한 밀실 야합보다는, 기본적으로공론화(公論化)를 통한 광범위한 소통정치를 중시했다.


 


임금은 해 뜰 무렵이면 사정전으로 나와 경연(經筵)을 열고, 통치자의 자세와 역할에 대해 최고위 관료들과 함께 허심탄회하게 토론하는 왕도교육이 진행되었다. 왕도교육(王道敎育)이 끝날 무렵에는 국정 정책과 정치현안에 대한 토론식 정책협의가 이어져, 중요한 국정현안들은 대부분 이 자리에서 결정되었다. 임금과 관료들은 토론과 심의를 통해 국정 사안의 공론화를 이끌어내고 합의에 의해 의사를 결정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결국 조선 정치의 기본 줄기는 폐쇄된 침전(강녕전)에서의 전횡적 밀실정치를 금기로 삼고, 열린 공간인 편전(사정전)에서의 공개정치를 통해 핵심 사안을 공론화한 후, 합의점을 찾기 위해 피나는 설득과 인내 그리고 기다림의 과정을 거쳤다. 이것이 사정전의 업무형태를 통해 확립된 소통정치의 기틀이고, 조선의 기본적 통치 철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