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가 되면, 노인들은 스스로 참회록의 주인공으로 변신한다. 세계 최빈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정은 뒷전으로 밀어 놓은 채, 온몸을 내던지며 산업화 전선의 선봉에 섰던 대부분의 노인들은 이제와 새삼 당시의 자랑스러웠던 자신의 행보에 회의를 느끼게 되고, 상처뿐인 영광이라는 자괴감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괴로워한다. 앞만 보고 뛰었던 역동의 시기에 혹여 자만에 빠진 채, 가족과 지인들에게 상처만을 남기지 않았나 하여 깊은 회한에 빠지게 된다. 오점뿐인 인생 행로에 이제 남은 건 노쇠해져 볼품없는 육체뿐이니, 이러한 시대적 죄업은 오로지 나홀로 짊어져야 할 나만의 멍에란 말인가?
성현의 말씀에, 인간에게는 누구나 벗어날 수 없는 근원적 원죄가 있다고 한다. 인간들은 태생적으로 거만한 눈, 거짓을 말하는 입과 혀, 폭력 적인 손과 발, 그리고 탐욕스러운 마음을 지니고 있어, 교만과 인색, 질투와 분노, 그리고 음욕과 나태 등 벗어날 수 없는 인간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속성들은 본능과 같은 것이기에, 사람들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본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수많은 죄업을 저지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맹자(孟子)는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파악하고 이를 물리치기 위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실천 덕목인 4단(四端)의 지침을 주창하기도 했다. 즉 측은지심(惻隱之心-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착한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남에게 양보하려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불교에서는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현재에 받는 괴로움의 과보를 업보(業報)라 말하고 있다. 즉, 업(業)은 생각이나 말·행동으로 지은 원인을 말하며, 업보(業報)는 그런 원인으로 말미암아 받는 결과를 뜻한다. 인간의 의도된 행위는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를 낳는다는 말이다. 이른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도덕적 법칙이 바로 업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지각 있는 존재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산업화 시대를 거쳐온 노인들(70~80세대)은 대한민국을 궁핍의 세상에서 풍요의 세상으로 바꿔 놓은 주인공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순리와 합리를 수없이 거역해야 했고, 이러한 무리와 역리는 분명 죄과에 해당될 것이지만, 하루 속히 기아에서 벗어나 경제발전을 이룩해야 하는 민족적 대의에 비추어 볼 때, 불합리의 죄과는 불가피할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의 노인들은 죄업보다는 오히려 공로가 지대한 세대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들 노인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를 떳떳하고 당당히 받아넘겨도 좋을 세대가 아닐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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