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조의 역사기행

(제5화) 정조(正朝)의 어제의빈묘지명(御製宜嬪墓誌銘)

추동 2020. 10. 15. 06:56

정조와 의빈 성씨, 어제의빈묘지명

 

어제의빈묘지명(御製宜嬪墓誌銘)

 

呼在嬪妾而識道理如其賢也

'아아! 후궁으로 있으면서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을 알았으니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聖人)의 다음 가는 사람과 같았다.

 

居勞貴而守謹約宣其祿也

지체가 높고 귀한 자리에서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검소함을 지켰다.

 

喪文孝淚猶未乾而又與在腹之兒同歸化盡

이에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하는데 문효세자를 잃고 겨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잘못되어 세상을 떠나버렸다.

 

嬪之命其亦可哀之甚也

빈의 운명은 그것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심히 불쌍하고 슬프도다.

 

今將送嬪于文孝之側而葬之此固嬪之願

이제 장차 빈을 문효세자의 곁에 보내서 장례를 치르는데

이는 빈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耳玄隧密邇魂氣流通終天泣訣之恨永以爲慰

무덤이 아주 가까워졌으나 넋은 막힘없이 잘 통하여 끝난 세상을 원통하게 울면서

사별한다. 이로써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서로 영원히 헤어지는 한을 위로한다.

 

而亦當哀予之不能忘哀也 其然乎 不然乎

너도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정조가 후궁 의빈 성씨의 죽음을 애도하며 손수 쓴 묘지명이다.

의빈 성씨가 사망한 1786년(정조 10년)에 작성했다.

사뭇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듯 써 내려간 묘지명의 전문은 마치 이슬비에 옷이 젖어들 듯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은 사랑의 고백에 가슴 떨리게 한다. 정조는 왕이었고 묘지명의 내용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내릴 수 있는 왕으로서, 남자로서 더 없는 예의였다.

 

정조는 평생 궁녀와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던 임금이지만, 그가 유일하게 한 눈에 빠져버린 승은 후궁이 있었으니 문효세자의 생모 의빈 성씨다. 본명은 성덕임이다. 의빈의 아버지 성윤우는 정조의 외조부 홍봉한 가문의 청지기였고, 그런 연유로 의빈은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와 혼인하면서 입궐하여 혜경궁을 모시는 궁녀가 되었다.

 

정조의 정비 효의왕후는 철 모를 때 만나 평생을 같이 한 동지 같은 사이였다. 화빈 윤씨, 수빈 박씨, 원빈 홍씨는 사대부 가문에서 뽑은 간택 후궁이지만, 의빈 성씨는 정조가 20년을 한결같이 기다려 이뤄낸 애틋하고 뜨거웠던 사랑의 결실이었다.

당시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있던 11세의 정조 눈에 아름다운 소녀 의빈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궁녀를 가까이하지 않겠다던 다짐이 무색할 정도로 정조는 의빈을 마음에 품었고, 어린 시절 소꿉친구처럼 지내며 가까이했다. 그러던 중 정조가 15살이 되던 해에 14세의 의빈에게 승은을 내렸는데, 정조가 직접 지은 ‘어제의빈묘지명’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의빈은 울면서

 

효의왕후(정조의 왕비)께서 아직 아기를 낳지 못하였으니 감히 받을 수 없아옵니다.”

 

라고 사양했다. 의빈은 죽을 각오로 정조의 승은을 거절한 것이다. 사실 궁녀가 임금의 승은을 거절한다는 것 자체가 당시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노여워하지 않았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정중하게 의빈의 거절을 수긍하고 마음을 접기로 했다.

 

그러나 정조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10여년이 지나 다시 승은을 내렸고, 의빈이 이를 받아들이며 후궁이 됐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의빈은 정조의 아들을 낳았다. 문효세자였다. 20년을 기다린 끝에 결실을 맺은 절절한 사랑. 안타깝게도 그 사랑은 오래가지 못하고 비극을 맞았다. 정조의 사랑에 주변의 시기와 질투가 난무한 탓인지 문효세자가 5살 어린 나이로 사망했고, 의빈은 그 슬픔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아들의 뒤를 따라가고 말았다. 슬픔에 사무쳐 밤을 지새우던 정조는 의빈 성씨를 위해 비석에 새길 글을 직접 지었다. 이것이 바로 '어제비문(御製碑文)’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 정조가 의빈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 너의 근본이 굳세어서 갖추고 이루어 빈궁이 되었거늘, 어찌하여 죽어서 삶을 마친단 말이냐? 가슴이 너무나 슬프고 애가 타 칼로 베는 것처럼 아프구나. 사랑한다."

 

문효세자의 무덤은 서울 용산구 효창동(孝昌洞)에 생모 의빈 성씨의 무덤과 함께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으로 강제 이장되었다. 효창원의 옛 터는 현재 효창공원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