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조의 역사기행

(제2화)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한 황조가(黃鳥歌)

추동 2020. 9. 17. 13:44

 

翩翩黃鳥 (편편황조) 펄펄 나는 저 꾀꼬리는

雌雄相依 (자웅상의) 암수가 서로 노니는데

念我之獨 (염아지독) 외로울 사 이내 몸은

誰其與歸 (수기여귀) 뉘와 함께 돌아갈꼬

 

<작가와 연대가 뚜렷하며 현전하는 최고(最古)의 개인적 서정시로서

삼국사기 권 13 고구려 본기”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사랑하는 님을 잃은 외로움을 꾀꼬리라는 자연물을 매개로 표현하였다.

작가(고구려 2대 유리왕)가 구체적으로 알려진 고대 가요이며,

집단 가요에서 개인적 서정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을 주제로 한 최초의 개인적 서정시이다.

화자(話者)의 주관적인 감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객관적인 대상(꾀꼬리)을

동원하여 화자의 외로운 마음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이 나이 40세에 세상을 떠나자 유리왕(儒理王)이 다음 왕위에 올랐다. 유리왕은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기 전 북부여 (北夫餘)에서 정실부인 예(禮)씨에게서 태어난 아들이다. 유리왕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 주몽이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소년 시절 유리는 장난이 아주 심했다. 유리는 어느 날 활을 가지고 놀다가 실수로 어느 부인이 이고 가는 물동이를 맞힌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부인으로부터 ‘천하에 아비 없는 후레자식.’이라는 욕설을 듣게 된다. 너무 주눅이 든 유리는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었다. 어머니 예씨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알고지금까지 숨겨온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너의 아버지는 보통 사람과 달랐단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 해치려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셨단다. 떠날 때 나에게 말하기를 ‘이후 만일 사내아이를 낳거든 내가 유물을 일곱 모진 돌 위 소나무 아래 묻어두었으니, 그것을 가지고 찾아오는 자를 내 아들이라 생각하겠소’라고 하시었다.”

 

어머니는 유리에게 말하며 지난날을 회상하였다. 그날부터 유리는 유물을 찾기 위해 산과 골짜기를 두루 헤맸으나 유물을 쉽사리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유물을 찾기 위해 집 마루에서 일어서다가 문득 주춧돌에 눈길이 갔고, 마루 밑으로 들어가 기둥 밑을 살펴보니 거기에 일곱 모진 주춧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춧돌 밑에는 부러진 칼끝이 나왔다. 유리는 졸본촌으로 내려와 부러진 칼끝을 부왕에게 바쳤다. 왕이 즉시 자신의 칼과 맞춰보니 틀림없이 동부여에서 도망치기 전에 묻어두었던 칼이었다. 주몽은 기뻐하며 그날로 유리를 왕자로 삼았다.

 

유리는 왕위에 오른 뒤 곧바로 옆 나라 송양국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그후 왕비 송 씨가 죽자 왕은 다시 두 여자를 후실로 맞아들였는데, 한 사람은 화희(禾姬)라는 골천 사람의 딸이고, 또 한 사람은 치희(雉姬)라는 한(漢)나라 사람의 딸이었다. 두 여자가 사랑 다툼으로 서로 화목하지 못하므로 왕은 양곡(凉谷)에 동궁과 서궁을 짓고 따로 머물게 했다. 그 후 왕이 기산에 사냥을 가서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은 사이에 두 여자가 다툼을 벌였다. 화희가 치희에게

너는 한나라 집안의 천한 계집으로 어찌 이리 무례한가?”

하면서 꾸짖으니 치희는 부끄럽고 분하여 친정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왕이 사냥에서 돌아와 보니 사랑하던 치희가 보이지 않는지라 아련한 그리움에 정을 잊을 수 없어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갔으나 치희는 너무 분하였던지 영영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상감마마 은총은 하해와 같사오나, 화희는 소녀를 한인의 천한 계집이라고 모욕하니 어찌 갈 수가 있겠습니까?”

치희는 눈물 어린 얼굴로 하소연하였고, 왕은 쓸쓸히 환궁할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화창한 봄날이라 신록이 우거진 버들가지에 황금 같은 꾀꼬리들이 짝을 지어 우지지고 있었다. 왕은 새들도 저렇게 화목하게 어울려 노는데 자신은 홀로 쓸쓸히 돌아가게 되니 정말 안타깝게 느껴졌다. 왕은 이 안타까운 심정을 한 수의 시에 담아 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