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이성계는 사냥을 하려고 말을 타고 황해도 곡산의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갈증을 느껴 말에서 내리게 되었다. 마침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는 아가씨가 있어 물을 달라고 청했는데, 그녀는 물을 한 바가지 떠서 그 위에 버들잎을 띄워 남자 에게 내밀었다. 사내가 뭐 하는 짓이냐고 화를 내자 여인은 웃으며 “물을 급하게 마시면 체할 수도 있으니 천천히 마시라는 뜻”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사내는 여인의 섬세한 배려에 탄복했고 그녀의 모습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얼마 후 이성계의 청혼으로 그들은 결혼에 이르게 된다. 이때 그녀는 16세의 처녀였고, 이성계는 그녀보다 21살이나 많은 37살이었다. 그녀가 바로 조선 창업임금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이며 조선왕조의 첫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였다. 강씨는 고려 말 격동기 때는 이성계의 정치적 자문역을 맡았고, 조선을 건국한 후 현비에 봉해진 뒤에는 내조에 힘써 태조가 새벽 일찍 옷을 입을 때 시간이 늦지 않게 살피고, 정사에 바빠 늦게 식사를 할 때면 음식이 식지 않도록 품고 있다가 따뜻한 식사를 대접하고, 정사를 보러 나가면 궁인들을 거느리고 배웅하고 해가 저물면 촛불을 들고 기다리는 등 온몸으로 내조에 열중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17세 때 함경도 안변에 사는 2살 아래인 신의왕후 한씨와 결혼하였고, 39년의 세월을 부부로 살면서 6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함흥에 있는 첫째 부인 한씨에게서는 전혀 받아보지 못했던 지극하고 따뜻한 정성에 깊이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는 신덕왕후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무조건적으로 따랐다. 첫 번째 부인인 한씨에게 태어난 장성한 여섯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씨의 소생인 어린 방석을 세자로 삼은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이때 방석의 나이는 11세였고, 방원은 혈기왕성한 26세의 중후한 청년이었다.
이러한 신덕왕후에 대한 이성계의 지극한 사랑이, 지금까지 자신이 세운 금자탑을 송두리 채 무너트려 파탄을 몰고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조선왕조가 개창한 지 막 4년이 지난 1396년 8월, 마흔 하나에 불과했던 신덕왕후는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2년 뒤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아버지 이성계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신덕왕후 소생인 방번과 방석, 경순공주의 남편 이제를 모조리 죽인다.
신덕왕후는 후일 태종이 되는 이방원에 의해 왕후가 아닌 첩의 위치로 강등되었고, 공식적인 사료나 기록에서 모두 삭제되었다. 태조 이성계의 신덕왕후에 대한 무조건적인 편집적 사랑은 냉철했던 그의 정상적 판단을 흐리게 하였고,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파국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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