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조의 역사기행

(제3화) 자규시(子規詩)와 단장가(斷腸歌)

추동 2020. 9. 24. 06:56

 

자규시(子規詩 = 소쩍새 시)---단종(端宗)

一自寃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나는 한 마리 궁궐을 쫓겨난 원통한 새

孤身隻影碧山中 (고신척영벽산중)    짝지을 그림자도 없는 외로운 몸 산속을 떠도네

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窮恨年年恨不窮 (궁한연년한불궁)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두견새 울음소리 끊어진 새벽 어스름 달빛이 비치고

血流春谷落花紅 (혈류춘곡낙화홍)    피 뿌린 듯 봄 골짜기에 지는 꽃(두견화)만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내 애끊는 소원 듣지 못하고

何乃愁人耳獨聰 (하내수인이독총)    슬픈 내 귀에 소쩍새 울음만 들리는 것이냐

 

※소쩍새는 자규 외에도 두견, 망제혼, 귀촉도, 불여귀, 접동새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왔다. 이는 한밤중 처량하고 피맺히게 우는 솟쩍새 울음소리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데서 이렇게 많은 별명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 시(詩)는 단종(端宗)이 숙부인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에 귀양 가 있을 때 영월 영흥리에 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지은 시다. 이 시에서 단종은 스스로를 궁에서 쫓겨난 한 마리의 새, 이 산 저 산 푸른 산 속을 옮겨 다니며 밤새도록 울어 대는 소쩍새로 생각한 것이다. 밤이 와도 잠은 안 오고 해가 가도 한이 끝이 없다는 그 애틋한 심경, 어린 열 다섯 살 나이에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단종(端宗)은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어린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단종의 모후는 단종을 낳다가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단종을 후원해 줄 내명부의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어린 국왕의 후원은 문종이 고명(顧命-유언)으로 후사를 부탁한 대신들이 맡았다. 당시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는 고명대신으로서 어린 임금을 보좌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단종 원년 10월 수양대군은 자신의 동생인 안평대군과 의정부 대신인 황보인, 김종서 등이 결탁하여 모반하려 한다는 것을 핑계로 군사를 동원하여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고 정권은 수양대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그후 단종은 송현수의 딸 송씨를 왕비로 맞아들였지만 궁중의 내시와 나인들까지도 수양대군이 두려워 눈치만 살피니 진정으로 어린 왕과 중전을 위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양대군 일파의 음모는 단종을 고립시키고 정신적으로 짓눌러 하루빨리 선위하도록 하자는 계략이었다.

 

단종 3년 6월 어린 단종은 마침내 내시 전균을 불러 선위하겠다는 뜻을 써주었다.

 

과인은 아직 어려 중외의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없도다. 지금까지 용상의 자리에 있는 동안 과인이 덕이 없어 많은 사람이 처형되었고 아직도 옥사가 계속되고 있으니 이제 더 이상 용상에 머물러 있을 수 없노라.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전하고자 하오니 조정 중신들은 과인의 뜻을 저버리지 말고 새 임금을 모시어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바라노라.”

 

수양대군은 형식상 선위를 받을 수 없다며 몇 번 양위의 뜻을 거두어 달라고 임금에게 호소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체면치레에 불과했다.

 

경회루 너른 대청에는 문무백관 2백여명이 엄숙히 도열했으며 양위를 받을 수양대군이 맨 앞에 서서 임금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왕이 나타나자 백관은 모두 허리를 굽혔고, 소년왕의 용안에는 창연한 빛이 역력했다. 백관을 한동안 둘러본 다음 충신이라고 믿는 동부승지 성삼문을 불렀다.

 

성삼문 승지!”

 

예, 전하∙∙∙∙.”

 

그대는 상서사(尙瑞司)에 가서 대보(大寶)를 가져 가져오시오.”

 

성삼문은 눈앞이 캄캄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왕명을 받들었다. 이윽고 성삼문이 대보를 받들고 들어오자, 단종은 수양에게 말하였다.

 

숙부가 이 대보를 받으시오. 어찌 과인만이 세종대왕의 자손이 되겠소. 숙부도 왕위를 이을 권한이 있습니다.”

 

수양대군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옥새를 가진 성삼문은 망설이다가 마침내 수양대군 앞에 내놓았다. 성삼문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고 백관들은 굳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옥새를 향한 수양대군의 눈길은 흔들림이 없었다.

 

황공하여이다! 전하.”

 

한마디 하고는 옥새를 집어 들고 천천히 일어나서 경회루를 떠났고 내시와 궁녀들이 수양대군을 뒤따랐다.

 

1457년 6월, 폐위된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단종이 유배된 곳은 영월읍에서 삼십리를 더 들어가는, 삼면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아래로는 서강이 휘감아 흐르는 깊고 깊은 산중, 청령포였다. 강변 옆은 깎아 지른 듯한 낭떠러지기 바위가 가로 막고 있어 배가 없이는 건너 갈 수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영월에서 유폐 생활을 하는 동안, 매일같이 관풍매죽루(觀風梅竹樓)에 올라 시를 지어 울적한 회포를 달래기도 하였다.

 

王邦衍 斷腸歌 (왕방연의 단장가)

千里遠遠道 美人別離秋 (천리원원도 미인별이추)    천만리 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此心未所着 下馬臨川流 (차심미소착 하마임류천)    내 마음 둘 곳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川流亦如我 鳴咽去不休 (천류역여아 명열거불휴)    저 물도 내 마음 같아 울어 밤길 가는구나

 

왕방연은 노산군이 된 단종을 영월 유배지로 인도한 것도 모자라 후일 금부도사가 되어 세조가 내린 사약을 봉행한 불운한 신하이다. 이를 비관한 왕방연은 한양으로 귀환하자 마자 곧바로 사직상소를 올린 뒤 지금의 남양주 어느 시골에서 남은 여생 동안 배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가 배 농사를 지은 까닭은 뒤늦게나마 삼촌인 수양대군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노산군(단종)의 제사상에 올리기 위함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왕방연이 배 농사를 지은 마을을 들어 “먹골배”라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