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연재

역사소설「사랑의 요소(要素)」- 21

추동 2023. 12. 18. 08:52

 

백성을 버린 임금−2

 

선조(宣祖)가 임금에 오른 것은 전혀 예견치 못한 일이었다. 후궁들의 치마폭 속에서 쾌락을 쫓으며 유유도일 했던 선대 임금 중종(中宗). 그의 일곱 번째 서자로 태어난 이가 덕흥군이고, 선조는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다. 정비(正妃)의 장남이 다음 임금을 이어받는 조선임금의 적장자(嫡長子) 승계원칙으로 보면 선조는 왕위 계승 순위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선대 임금이 적장자없이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정파의 필요에 의해 16세의 어린 나이로 갑자기 임금에 오를 수 있었다. 제왕이 되기 위해 호되게 거처야 할 수련과정을 전혀 거치지 못하고 임금이 된 그는, 조선 왕계(王系)의 정통성도 부적격이었고 덕목도 갖추지 못해 자격 없는 임금임이 분명했다. 그는 자신이 진정 임금이 된 것인지 믿기지 않아 한동안 불안에 떨어야 했고, 평생을 열등감과 자괴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왕위에 오른 다음 해에 14세인 의인왕후와 국혼을 치렀으나 감히 왕비를 부인으로 대하기가 곤혹스러웠던지 정상적인 부부생활이 어려웠다. 자연히 정비인 그녀는 자식도 없이 허울뿐인 왕비 자리를 30여 년이나 지켜야 했다. 대신 젊은 임금의 욕정을 채워주던 상대는 후궁 공빈 김씨였다. 그녀는 임해군과 광해군을 연년생으로 남긴 채, 산욕으로 세상을 떠났고, 다른 후궁인 인빈 김씨가 임금의 총애를 받는 상대가 된다. 적자(嫡子)가 없는 상황에서 임해군(臨海君)이 장자이기는 하나 성격이 거칠어 임금의 재목으로는 적합하지 않았고, 광해군(光海君)이 세자로서 조신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으나 선조의 마음은 농염한 여인 인빈의 아들 신성군(信城君)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이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한 것이다.

나라의 존폐가 불투명한 난리 통에 신성군이 세자가 되면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라 예상한 인빈 김씨는 아들 신성군을 사지(死地)에서 구하기 위해 왕세자 책봉을 여러 핑계를 들어 사양하며 광해군에게 양보하였고, 선조는 선뜻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지 못하고 망설이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왜적의 한양 진입이 눈앞에 임박하자, 한양과 궁궐을 지켜야 할 수비 병사들은 근무지를 이탈한 채 뿔뿔이 흐트러지고, 임금은 겁을 먹고 우왕좌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때 영의정 이산해가 허겁지겁 강녕전으로 뛰어들어오더니

“전하, 일이 급박하옵니다. 어서 채비를 하여 평양으로 떠나셔야 하옵니다.”

새로 도승지에 오른 이항복도 급히 뒤따라 들어오며 절박하게 간언한다.

“알겠소. 어서 떠날 차비를 서두르시오. 경들도 함께 떠날 준비를 하시오.”

 

때는 달구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사월 그믐날 새벽이었다. 임금은 우선 군병 모집을 핑계 삼아 장남 임해군과 삼남 순화군 등 왕자들을 함경도와 강원도로 피신시킨 후, 자신은 말을 탄 채 비를 맞으며 광해군과 함께 궁성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황망한 피난길이라 중전과 후궁들은 가마도 없어 맨 걸음으로 뒤를 따른다. 혹시 백성들의 눈에 띌까 겁을 먹었던지 허겁지겁 도망치는 모습이 볼 상 사납기 이를 데 없었다. 중전과 후궁들이 궁궐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궁녀들은 다리를 걷어붙이고 울면서 그 뒤를 따라 나선다. 비록 행선지도 정하지 못하고 떠나는 몽진 길이지만, 임금이 심중에 품고 있는 목적지는 저 멀리 압록강 건너 중국 땅을 향하고 있었다. 나라의 운명을 포기한 패군의 초라한 도피 행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현(沙峴-무악재) 마루턱에 오른 임금은 마지막으로 한양을 돌아다본다. 폭우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한양 장안은 불빛으로 변하여 여기저기서 화광(火光)이 충천한다.

“한양에 웬 불길이 저리 치솟느냐? 큰 불이 난 게 아니냐?”

임금이 놀란 눈으로 옆에 있는 도승지에게 묻는다.

“경복궁이 불타고 있다 하옵니다. 화재가 일어난 듯 보여지옵니다.”

“무엇이라고? 궁궐에 화재가 났단 말이오?”

“전하, 송구하옵니다만 급히 궁을 빠져나오느라 불 단속을 소홀히 한 모양이옵니다.”

“허허∙∙∙∙∙, 이런, 이런 이 무슨 엎친 데 덮친 날벼락이란 말이오--.”

임금은 허망한 표정으로 한양을 바라보며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고 있었다.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패주(敗走)의 길에 올랐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지자, 광화문 앞에 모여 있던 흥분한 백성들은 무리를 지어 궁궐 안으로 난입하기 시작했다. 궁궐을 지키는 수비 병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보이지 않고, 광화문은 덩그러니 열려 있었다. 궁중에 난입한 이들 백성들은 함성을 지르며 궁중의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갔다. 백성들은 이미 백성이 아닌 폭도였다. 그러나 이를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치안은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이다.

“나라를 버린 임금의 궁은 불살라버려야 한다--!”

누군가 궁궐을 불태워야 한다고 울부짖자, 와아--! 하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불길이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불길은 경복궁에서만 오르는 게 아니었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 관청들은 물론 창덕궁, 창경궁이 차례로 화마에 휩싸였다. 궁궐의 전각들은 빗속에서도 밤새도록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