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분(彰芬)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눈골 식구들이 먹고 살아갈 식량을 마련하는 일이다. 자신이 이 마을을 이끌어가야 할 촌장인 이상 비록 말없이 지켜주던 한식이 뒤에 없을지라도, 마을 식구들 모두를 굶게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자신을 채찍 한다. 그것이 창분에게 주어진 현실이었고, 그런 과정을 겪으며 그녀의 심성은 더욱 강인해지고, 그녀의 의지 또한 더욱 굳건해진다.
며칠 동안 너새집 초막에 누운 채 깊은 수렁 속을 헤매던 창분은, 만삭의 몸으로 자신을 구완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매달리고 있는 순옥(順玉)을 바라보고는, 깊은 자책에 빠진다. 아비 없이 태어날 아이를 배가 산이 되도록 뱃속에 품고도 서럽다는 내색 한번 못하고 꿋꿋이 버티는 순옥을 보면서 심한 가책을 느낀 것이다. 한식(漢植)이 옆에 있을 때는 미쳐 느끼지 못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앞으로 자신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할 동반자는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순옥뿐 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순간 알 수 없는 강렬한 힘이 몸 안에서 솟구치면서 벌떡 일어날 수 있었고, 머리맡에 순옥이 차려 놓은 밥상을 단숨에 비우고 생기를 되찾아 몸을 뻗쳐볼 수 있었다. 그녀는 한식이 명(命)이 길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천만다행한 일이겠지만, 그건 하늘에 달린 문제이니 모든 건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며 마음을 눅인다.
‘하기야 노비 주재에 온전한 가정을 꾸리고 살 거라는 기대는 애당초 꿈도 꿔본 적이 없지 않은가! 당연히 자신은 혼자 살 팔자라고 태초부터 정해진 몸이 아니던가? 눈골 식구들 중에 홀몸으로 사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던가! 대신, 눈골마을 이 십여 명이 모두 한식구가 아닌가!’
여러 날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창분이 홀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리고는 마을 위쪽에 우람하게 우뚝 서서 마을을 감싸 안고 있는 신령한 거목(巨木) 가문비나무 밑으로 올라간다. 그 뒤를 만삭의 순옥이 뒤따른다.
가문비나무는 하늘의 천신(天神)과 마을사람들을 접속시켜 그들을 올바른 행로로 인도해주고 마을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눈골마을의 지축(地軸)과 같은 신목(神木)이다.
가문비나무 밑에 무릎을 꿇은 창분은 신목을 우러러 자신에게 비련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내려 달라고 간절히 애원한다. 그러다가 제 설음에 겨웠던지 흐느끼며 울음을 터트린다. 마치 가문비나무를 타고 환생한 엄니를 만나 자신의 설음을 하소연이라도 하는듯, 복받치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한없이 눈물을 쏟아낸다. 옆에 서있던 순옥도 동병상련의 눈물을 함께 흘린다.
그러나 두 여인의 눈물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창분과 순옥은 앞으로 어떠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두 번 다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무언의 약조를 주고받는다. 창분과 순옥은 물론 눈골 가족 모두는 인간의 밑바닥에서 금수와 같은 생활을 겪으며 설음 따위는 일찍이 뭉개 버리고 여태껏 목숨을 부지해온 끈질긴 민초들이 아니었던가!
창분은 눈골 식구들을 모두 신목(神木) 밑으로 불러 모은다.
창분의 몰골은 창백하다 못해 백지장에 가까웠다. 요 며칠 사이 그녀의 상심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가문비나무 아래로 모여든 눈골 식구들은 그런 창분의 모습을 차마 눈뜨고 쳐다볼 수 없었다. 식구들의 살길을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하던 중 뜻밖에 낭군을 잃고 한쪽 날개가 꺾여 저 모양이 되었으니, 그녀를 처다 보기가 면구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쓸어질 듯 휘청거리는 창분의 모습은 너무도 비탄해 보였지만, 그러나 그녀의 강렬한 눈매는 눈골 식구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창분을 정시하지 못한 채 애꿎게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마을 식구들에게 창분은 말문을 연다.
“내게 닥친 일은 이제 그만 덮어줬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애틋한 마음으로 나를 위로하려 들지 마세요! 지금은 누구를 동정하고 위로해줄 여가가 없어요. 우리는 모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에 와있어요. 지금 무엇보다 급한 것은 화전민(火田民)들이 일궜던 밭고랑을 되찾아 밭을 갈고 겨울농사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래야만 내년 일년간 먹을 식량을 확보할 수 있어요. 그것뿐만이 아녜요––! 야생 버섯과 약초를 캐내기 위해 온 산을 이잡듯 뒤져야 해요. 그렇게 채취한 버섯과 약초는 산남읍에 있는 약재상에 팔아 올 겨울 모자라는 식량을 채울 거예요. 견디기 어려운 일들이 우리 앞을 가로 막고 있지만, 모두들 합심해서 땅을 파지 않으면 우리는 먹고 살 수 없어요. 그러나 올 겨울만 잘 넘기면 내년부터는 식량 걱정을 덜고 우리 힘으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우리만의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 각오를 단단히 해야 될 거예요. 지금부터 여러분들이 할 일을 말씀드릴 게요. 모두들 진력을 다해 따라 주시기 바래요.”
농경을 주업으로 하는 이 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곡식을 얻는 일일 것이다.
곡식은 사람들의 배를 채워 삶을 유지시켜주는 생명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사람이 살아간다는 자체가 결국 곡식을 쟁취하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투쟁의 과정일 것이고, 그 투쟁이 멈춰졌을 때, 그때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일 것이다.
창분이 선도하는 눈골 식구들의 삶 역시, 산골에 씨를 뿌려 곡식을 얻으려는 과정이다.
그것은 결국 식량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투쟁의 과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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