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끝없는 여정"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15

추동 2020. 9. 21. 09:21

산악지대의 밀과 보리 농사

 

가문비나무 밑에서 창분과 마을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부르짓고 있는 독자생존의 결의는 동토의 산하를 녹이기라도 하듯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창분은 마을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식량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에 대해 자신의 야심 찬 계획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비록 그녀의 목소리는 힘이 부친 듯 나직하고 여리게 들렸지만, 그러나 그녀의 말은 단호하고 절박했으며, 지금은 더 이상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는 점을 마을사람들에게 결연한 의지로 각인시키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식량확보를 위한 전쟁 선포였고, 농사일정과 작업목표를 하달하는 작전명령이었으며, 이 작전에 단 한 사람의 낙오자도 용인할 수 없다는 마을 규약의 선포였다. 전쟁을 치르는 비장한 각오가 아니고서는, 눈골 마을사람 모두가 이곳 험산에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선 부녀자를 중심으로 밀과 보리농사를 맡을 일꾼들을 지정하고, 건장한 사람들은 자생 약초와 약용버섯을 캐는 일에 배치했다. 일부 장정들은 소나무와 참나무를 벌채(伐採)하여 마을 옆 그늘진 구릉지(丘陵地)에 쌓아 놓고 송이버섯과 표고버섯을 재배할 수 있도록 요령을 일러주었다. 일단 보리와 밀의 파종을 마치고, 통나무에 구멍을 뚫어 버섯 종균(種菌)을 접종(接種)하는 일이 끝나면 모두들 산으로 올라가 자생 약초와 약용버섯을 채집하도록 산지(山地) 작업일정을 정했다. 보리와 밀은 파종(播種)을 한 후 씨가 얼지 않도록 나뭇잎을 덮어주고 아침 저녁으로 밟아 주기만 하면 큰 힘들이지 않고 잘 자라주는데, 문제는 값나가는 약초를 캐는 일이었다. 주로 대황(大黃)이나 당귀(當歸), 불로초(약용버섯), 겨우살이, 그리고 각종 버섯들이 이곳 고산준령 여기저기에 군락(群落)을 이루며 자생하고 있는데, 처음 식별요령을 익히기만 하면 쉽게 약초 꾼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산지에 깔려 있는 것이 귀한 약초와 버섯이었다.

 

눈골 식구들은 이렇게 고산지대의 고랭지(高冷地) 농경과 버섯재배, 약초 채취를 창분의 지도하에 차근차근 실현해 나가기 시작한다.

 

모처럼 햇볕이 따사롭고, 하늘이 맑게 갠 어느 저녁나절이었다. 마을에 산그늘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산골은 금세 해가 저문다. 그리고는 빠르게 사방이 어두워진다.

바로 그때, 동토의 지대, 대덕산 골짜기에 난데없이 갓난아이의 맑고 우렁찬 울음소리가 산울림이 되어 멀리멀리 퍼져 나간다. 마치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을 예고라도 하는 듯~~. 순옥이 천씨 할멈의 조리(調理)를 받으며 씩씩하게 생긴 사내아이를 출산한 것이다.

 

순옥 못지않게 기쁜 마음으로 아이를 반긴 이는 바로 창분이었다. 아이의 얼굴에 흐르는 천진난만한 미소가 얼어붙었던 창분의 가슴에 인정(人情)과 온기(溫氣)를 불어넣어, 옛날의 창분으로 되돌려 놓았기 때문이다. 아이의 미소 속에는 한 많은 여인네들이 평생을 지고 살아야 하는 ‘가슴앓이’를 단숨에 치유하는 묘약이 숨겨져 있는 모양이었다.

 

개마고원에는 사람의 발길이 드물었던 탓인지 각가지 야생작물들이 지천에 깔려 있었고, 그 중에는 귀한 약제(藥劑)로 쓰이는 약초들도 어렵지 않게 발견되었다. 뿐만 아니라 마을사람들의 희망이 걸려있는 고랭지 곡물 경작도 별 탈없이 진척되고 있어, 눈골 식구들의 얼굴에 밝은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이러한 호기에 순옥의 아들 복돌이가 태어남으로써 고립무원의 산골마을에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천지사방으로 울려 퍼진 것이다. 복돌이는 천씨 할멈의 차지가 되었고, 창분(彰芬)과 순옥(順玉)은 농사와 채집을 독려하기 위해 온 산을 산 다람쥐처럼 뛰어다녀야 했고, 사이사이 틈이 나는 대로 산을 내려가 산남읍(山南邑) 약제상 이형석(李亨錫)을 찾아가야 했다. 마을사람들이 땅을 파서 걷어들이는 약초와 버섯들이 진품(珍品)인지 여부와, 값은 얼마나 나가는지를 확인해야 하고, 버섯재배에 대해서도 중간중간 지도를 받기 위해서였다.

 

사실 창분이 이형석을 자주 만나야 하는 주목적은, 마을사람들이 땀 흘려 캐낸 약초를 비롯하여 갖가지 산물(山物)들을 값을 매겨 식량과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마을사람들의 겨울 양식을 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분은 이런 물물교환 과정을 거치면서 흥정 요령에 대해 조금씩 눈이 떠졌는데, 한 푼이라도 더 좋은 값을 받아내려면 상대에게 신의(信義)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과 진솔(眞率)한 태도로 흥정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는다. 창분이 익히려는 것이 바로 믿음을 바탕으로 밀고 당기며 성실하게 흥정하여 결국에는 더 많은 이득을 얻어내는 장사 수완이었고, 이러한 철칙(鐵則)과 같은 상거래 원리를 창분은 비상한 자세로 익혀 나갈 수 있었다.

 

처음 막막하기만 하던 눈골의 살림살이는, 마을사람 모두가 험산준령을 평지로 여기며 힘든 줄도 모르고 뛰어다닌 덕에 큰 변고 없이 하루하루가 나아질 수 있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창분이 있었고, 그녀의 뜨거운 열정과 명쾌한 태도가 이 마을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되었다.

 

허나 쉼 없이 동분서주하는 그녀에게도 한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