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조의 역사기행

(제10화) 정도전(鄭道傳)의 『자조(自嘲)』

추동 2020. 11. 26. 22:05

조선 태조 이성계와 그의 책사 정도전

 

- 정도전(鄭道傳)의 절명시(絶命詩) 『자조(自嘲)』–

 

操存省察兩加功 (조존성찰량가공)

마음을 보존하고 성찰하기에 한결같이 공력을 다 기울여

 

不負聖賢黃卷中 (불부성현황권중)

서책 속에 담긴 성현의 교훈 저버리지 않았다네.

 

三十年來勤苦業 (삼십년래근고업)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쉬지 않고 쌓아온 업적

 

松亭一醉竟成空 (송정일취경성공)

송현방 정자에서 한 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네

 

(정도전의 “자조(自嘲)”는 1,398년 8월 제1차 왕자(王子)의 난(亂)으로 이방원의 칼에 맞아 죽기 직전, 자신의 최후를 정리하며 남긴 절명시(絶命詩)이다. 정도전은 스스로 자신을 조롱하는 내용의 시를 남겨 영웅호걸다운 면모를 여실히 보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매우 사실적이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정에서 일어난 일들을 사실만을 기록한 실록으로

유네스코에도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록이 되어있다.

"역사는 사실을 기록하고 그에 대한 평가는 후세에 맡긴다."는 정도전의 뜻에 따라 쓰여 지기 시작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사기(史記)조차 사마천(司馬遷)이 혼자 썼기에 해석이나 고증이 필요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은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하지만 정도전에 대한 기록에 대해서는 유일하게 갑론을박이 많고 특히 정도전의 죽음과 관련된 부분은

실록이 아닌 다른 기록들이 더 역사적으로 유력하다고 하는데,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정도전이 쓴 절명시(絶命詩) 자조(自嘲) 때문이다.

조선 개국 전부터 목숨을 위협받을 때도 항상 굽히지 않았고, 죽기 전에 저런 시를 남길 정도로 기개가 있는 인물을, 조선 태종 왕조실록에 기록된 정도전 최후의 모습은 비굴하고 나약한 졸부로 그려져 있어 의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초창기의 기록은 조선왕조에 유리하게 쓰여 졌다는 것도 한몫 했다.

 

1398년 8월 26일, 정도전은 56세의 나이에 이방원에게 목이 잘리는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이날 정도전이

뒤집어쓴 죄목은 반란 예비 음모죄였다. 정도전의 집안도 풍비박산이 났다. 네 아들 중 유(游)와 영(泳)은

아버지를 구하러 가다가 이방원의 군사들에게 죽었고, 담(澹)은 아버지와 형제들이 비명 횡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조용히 자결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진(津)은 세종 때 형조판서를 지냈고, 장손자는 세조 때

우의정에 올랐다. 태종 이후의 임금들도 정도전 역적론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지만, 정도전 죽이기의

유일한 예외는 개혁군주 정조(正朝)가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三峯集)'을 재 간행해 탐독했던 일이었다.

정도전은 고종 때의 대원군에 의해 경복궁 설계의 공을 인정받아 복권되었다.

 

정도전(鄭道傳)은, 중국의 전설적 책사(策士)들인 주공단(周公 旦-주나라 무왕과 성왕의 책사), 장량(張良-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책사), 저우언라이(周恩來-모택동의 책사) 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한국 역사에서 보기 드문 책사였다. 그들은 정도전처럼 국가의 구도를 전면적으로 설계하지는 못했다. 그들이 더 나은 게 있다면, 그들 나라의 영토가 정도전의 나라인 조선보다 훨씬 더 컸다는 것일 뿐이다. 정도전에게는 이들과 다른 강렬한 내면적 야망(野望)이 있었다. 정도전은 이들보다 훨씬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지만, 그 야망때문에 훨씬 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주군인 이성계를 이용해서 자신의 이상을 펼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고, 자신을 결코 책사(참모)로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던 성리학적(性理學的) 이상세계(理想世界)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끝내는 정적(政敵)의 칼에 단죄되었고, 조선 왕조의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신원(伸寃)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정도전은 선비인가 하면 정략가(政略家)였고, 유교(儒敎) 이론가인가 하면 군사(軍事) 지휘자였다.

그는 새 왕조 조선의 건국이념·대외관계·경제체제·정치체제·사회체제·종교철학·도시구조 등을 거의 혼자

힘으로 설계했다. 경복궁과 종묘 사직, 한양도성, 그리고 태평로, 종로 등 서울 도심의 기본 설계, 사대문과

사소문, 그 안의 동네 이름이 다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정도전은 이미 6백 년 전에 절대권력에 의한

독점적 군주제(君主制)의 한계를 인식하고, 재상(宰相) 중심의 분권적 정치체계를 실천한 합리주의자였다.

근∙현대 정치사에서 정도전을 주목하는 것은, 6백여 년 전 그가 주창한 조선의 정치구조가 개인의 역량보다는 시스템의 기능에 초점을 맞춘, 영국의 입헌군주제와 유사한, 재상(宰相)이 중심이 되는 '신권정치(臣權政治)'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