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사랑의 요소(要素)」- 8
제2부)
출생의 비밀−3
평소와 같이 순금(順錦) 어미가 신정리 김 진사 댁에서 일을 하던 날, 순금은 일찍 집으로 돌아왔으나 웬일인지 엄니는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일찍 순금이 진사 댁으로 달려갔으나 엄니는 분명 어젯밤에 집으로 돌아갔다는 답변이었다. 울음을 그치지 않는 순금이 가여웠던지 진사 댁 마님은 천 서방을 찾다가 보이지 않자 하인 삼돌이를 시켜 순금 어미를 찾아보라고 일렀다.
순금을 데리고 길을 나선 삼돌은 종일 순금 어미가 갈만한 곳을 찾아 여기저기 수소문했으나 허사였다. 강가에도, 산중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고, 그녀를 목격한 사람도 없었다. 종일 싸돌아 다니느라 지친 나머지 순금 집 마루에 걸터앉아 쉬고 있자니 아랫마을 명이 할멈이 숨이 턱에 차 허겁지겁 뛰어오며
“이 보게 삼돌이!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순금 어미가~ 순금 어미가~”
마을 어귀 길섶에서 죽어 있는 순금 어미를 발견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전갈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그녀의 시신을 지게에 진 마을 청년들이 들이닥쳤고, 순금은 너무 놀라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자지러지고 말았다.
순금 어미는 신정리 부촌마을에서 산수마을로 넘어오는 언덕길 숲 속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겁탈을 당하면서 옥신각신 드잡이 끝에 변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비록 오지마을이긴 했지만 마을이 생긴 이래 이런 일은 처음이었고, 확실한 것은 이곳에 외지사람이 들어올 리 만무하니 순금 어미를 잘 아는 마을사람 중 누군가의 짓이 분명해 보였다.
“도대체 어느 천벌을 받을 놈이 그 딴 짓을 저질렀단 말이여~~, 어느 죽일 놈이~~, 그나저나 가여운 순금이는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한단 말이여−−”
명이 할멈이 순금을 부여안고 목청을 높여 한탄한다. 명이 할멈은 평소에도 피붙이나 되는 양, 순금 엄니 모녀를 살갑게 챙겨 주시던 정 많은 할머니였다.
그러나 가난뱅이 오지마을에서 어찌 범인을 가려낼 수 있단 말인가! 다만 이상한 징조는 김 진사 댁 천 서방이 그날 이후로 보이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졸지에 하늘 같은 엄니를 잃고 천애고아가 된 순금은 어린 나이에 살길이 막막했지만, 산수마을 명이 할멈이 김 진사 댁 마님께 울고불고 매달리며 말씀을 드린 결과, 의외로 마님의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고, 그날부터 진사 댁 부엌일을 거드는 어린 막서리로 살게 되었다. 그때가 순금의 나이 열 두어 살쯤 되었을 때다. 산수마을 집에는 어린 나이에 혼자 지낼 수 없었으므로 진사 댁 부엌에 딸린 방에서 그 댁 여자 종비(從婢)들과 함께 지내기도 하고 가끔씩 엄니가 보고 프면 산수마을 집에 가서 엄니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날도 있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온통 어둡고 막막하여 굳어 있는 미라처럼 말도 닫고 표정도 멈춘 채, 막힌 듯 탈진한 듯 하루하루를 넘기던 순금의 몸에도 차츰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산이고 마을이고 할 것 없이 산지사방을 뒤덮은 봄 참꽃이 순금의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씩 녹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김 진사댁 생활도 어느덧 서너 해가 흘러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