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의 아침, 광화문이 열리다

궁궐의 아침, 광화문이 열리다(제5회)

추동 2019. 8. 8. 16:22


(사진-4) 한양의 풍수지리−한양은 외사산과 내사산 등 8개의 산으로 둘러쌓여 있고,

그 외곽에 또 다른 8개의 산이 에워싸고 있어 철옹성 같은 방위선을 이루고 있다.



4. 경복궁 자리가 정해진 곡절(曲折)


 국가의 수도(首都)를 정하기 위해서는 풍수지리(風水地理)와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에 따라 주도(主都)의 버팀목이라 할 수 있는 주산(主山)과 진산(鎭山)을 어디로 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는데, 조선건국 직후 이성계는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적극적인 동조를 얻어 몇몇 정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백악산(북악산)을 주산으로 하는 한양의 위치와 범위 그리고 방향을 확정 지을 수 있었다.


 


한양은 북쪽의 백악산을 주산, 북한산을 진산으로 하여, 남쪽의 목멱산(남산)을 안산, 관악산을 조산으로 하고, 동쪽의 타락산(낙산)을 내청룡, 용마산을 외청룡으로 하며, 서쪽의 인왕산을 내백호, 덕양산을 외백호로 하는 4개의 내사산과 4개의 외사산 등 8개의 산이 에워싸고 있는 명당의 중심 영역인 혈()의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다만 동쪽의 좌청룡 역할을 하는 낙산(洛山)의 산세가 지극히 낮고 허약하여 동쪽에서 몰려오는 나쁜 기운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없다는 것이 풍수지리와 음양오행상의 취약점으로 지적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임금이 거처하며 국가를 통치해야 할 궁궐의 위치를 정하는 데에는 많은 진통을 겪어야 했는데, 특히 풍수지리의 해석에 있어 자웅(雌雄)을 겨루기 어려울 정도로 최고의 경지에 올라있는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주장이 서로 엇갈려 더욱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조선의 국가 통치체계를 설계한 정도전(鄭道傳)은 백악산을 배경으로 궁궐을 세우는 대신 한양의 동문(東門)인 흥인문의 명칭을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하고 강력한 옹성을 덧붙여 낙산의 허약한 산세를 보강하자는 주장이었고, 반면 이성계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무학대사(無學大師)는 인왕산을 배경으로 궁궐을 지어 백악산의 동쪽 줄기가 낙산의 산세를 보강해 줌으로써 동쪽의 방위력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양보 없는 극렬한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두 사람 다 주군(主君)인 이성계의 신변에 상서롭지 못한 나쁜 기운이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충성심의 경쟁 탓이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던 태조 이성계는 결국 정도전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어 백악산 밑에 경복궁을 짓도록 결정하였는데, 이는 정신적으로 깊이 의존하여 친밀감을 느끼는 무학대사를 양보시키는 것이 덜 부담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은 지 2백 년 만에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은 소실되었고, 15대 광해군 이후 25대 철종에 이르기까지 여러 임금들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백악산이 배경인 창덕궁과 인왕산이 배경인 경희궁을 오가며 거처를 옮겼는데, 결과적으로 인왕산의 경희궁 시절이 백악산의 창덕궁 시절에 비해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정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평가된다. 수도인 한양의 주산은 큰 지세로 보아 백악산 이어야 맞지만, 임금의 거처인 궁궐의 배경산(背景山)은 무학대사의 말대로 인왕산이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선개국 초기 풍수전문가들은 한양의 주산인 백악산(白岳山)을 풍수지리상 한반도 동서남북 모든 산의 정기(精氣-생명의 원천)가 하나로 모이는 영산(靈山)으로 평가하였다. 백악산으로 모인 한반도의 모든 정기는 경복궁으로 전달되고, 그것은 다시 임금의 생명과 권위를 상징하는 근정전(勤政殿)으로 집결되어 비로소 한반도의 온 백성이 임금을 중심으로 하나로 우뚝 설 수 있는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고 믿었다. 아마도 왕조시대인 당시의 시류에 맞추어 왕권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의도적 해석이었을지도 모른다.


 


백악산(白岳山)의 백()은 백의민족(白衣民族)인 한민족의 상징 색()으로 여겨져, 고귀하고 신성하며 순결함을 의미하였고, 흰색은 본능을 억제하고 감각과 감정을 절제하는 조선시대의 선비정신과도 부합하여 민족의 색으로 선호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흰색은 빛을 의미하며 빛은 하늘(-)을 상징한다고 믿어, 하늘 산()인 백악산은 임금은 물론 한반도의 모든 백성들을 지켜주는 하늘의 수호신(守護神) 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소실된 지 273년만인 고종 때 우여곡절 끝에 경복궁이 복원되었으나 왕궁으로서 제대로 활용되지도 못한 채, 일본 무력의 압박 속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 등을 겪다가 40여 년 후인 1910 8 29일 조선왕조는 국운이 다하여 일본에 강제 합방되었고, 이후 경복궁은 일제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