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끝없는 여정"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45

추동 2021. 5. 4. 07:28

 

어린 나이임에도 조금도 힘들어하지 않고 대덕산을 오르내리며 학업에 열중하는 딸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던 복돌은, 설화의 학구열을 대견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잔한 생각이 들어 마음이 뭉클해진다. 힘이 넘치는 장정들도 다니기 어려운 험한 산길을, 아이는 땀 투성이가 되어 오르내리면서도,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서당엘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설화야! 산길 오르내리는 게 많이 힘들 텐데––, 괜찮은 것이냐?”

 

“아니, 괜찮아요. 중국말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횐데 견뎌내야죠. 그리고 제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요. 그래야 엄니처럼 저도 이담에 여류상인으로 우뚝 설 수 있지 않겠어요?”

 

복돌은 순간 딸 아이가 남몰래 앓고 있는 심통(心痛)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는 아차 하며 가슴을 친다. 복돌은 경성 장사판 일을 빙자하여 자신이 아이에게 너무나 소홀히 대했음을 뒤늦게 인식하고는 자책하며 괴로워한다.

‘–과연 설화의 마음에 얼마나 깊은 애상(哀傷)과 희원(希願)이 뭉쳐져 있었으면, 저토록 어려움을 억누르며 내색 없이 산악 길을 오르내릴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웬만한 끈기가 아니고서는 익히기 어려운 중국어 학습에 저리도 군말 없이 몰입할 수 있는 것인가! 이 모든 게 결국은 제 어미를 향한 회한을 조금이나마 풀어보려는 고통의 행로가 아니겠는가–!‘

 

설화는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마을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원망과 눈총을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각(知覺)이 드는 그 순간부터 자기 때문에 세상을 떠나간 엄니의 슬픈 형상을 죄인의 심정으로 가슴 속에 품고 지내야 했다. 언젠가 자신이 어른이 되면, 엄니가 살아생전에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신이 대신 실현함으로써 구천에서 떠도는 엄니의 한을 풀어드려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은 언젠가 여류상단의 최고봉에 올라, 엄니를 자신의 앞에 당당하게 환생시켜야 한다고 굳게 다짐하고 있었고, 그것이 자신이 해야 할 엄니에 대한 보은의 책무이자 꿈이라고 믿었다.

 

설화가 제 어미에게 죄책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복돌은 큰 충격을 받는다.

설화가 제 어미에 대해 하등의 부담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감싸주어야 하는 게 아비인 자신이 해야 할 일임을 미쳐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한때는 자신이 얼마나 이 아이를 원망하며 미워했던가!

복돌은 한나절을 이리저리 고심하며 궁리한 끝에 설화를 위한 자신의 계획을 작정하고, 두분 엄니인 창분과 순옥에게 털어놓는다.

 

“엄니! 아무래도 우리 사는 집을 산남(山南) 읍내로 옮겨야겠어요––. 그러는 게 여러모로 편리할 것 같아요. 지금 산남 약제에는 연로한 이형석(李亨錫) 어른이 혼자서 약제를 조제하랴 환자들 진료하랴 그야말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지내고 계세요. 게다가 나와 둘이서 다니던 여상(旅商)을 이덕현(李德鉉)이 혼자서 뛰다 보니 힘은 힘대로 들고 약제공급은 공급대로 늦어져 각 지역 약방에서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닌 모양이에요. 우리가 읍내로 거처를 옮기면 두분 엄니께서 약제조제와 약제상 일을 분담할 수 있지 않겠어요? 여상(旅商)문제도 제가 아는 보부상과 연결시키면 약제공급이 훨씬 수월해질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설화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줘야겠어요. 어린 아이가 저렇게 공부에 열중인데 산길 오르내리며 공부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거에요. 엄니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나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만 이사(移徙)라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느냐? 설화를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이사를 하긴 해야겠는데∙∙∙∙, 선뜻 이사하기가 망설여지는구나. 마을사람들 시선도 걱정이 되고∙∙∙∙. 순옥이 네 생각은 어떠냐?”

 

창분도 그리 하는 게 좋겠다는 듯 응대를 하고 있지만, 눈골에서 겪어온 온갖 희로애락의 긴 세월이 마음에 걸렸고, 특히 마을사람들이 어찌 생각할는지도 염려가 되어 얼핏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순옥에게 말문을 넘긴다.

 

“나도 네 생각이나 마찬가지지, 뭐––. 하지만 설화 공부를 위해서라도 이 참에 큰 맘 먹고 읍내로 나가보는 것도 괜찮을 상 싶다. 그 대신 절반 가까이는 어차피 이곳에서 지내야 하니, 마을사람들 보기에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순옥 역시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아들 복돌의 의견에 적극 찬성한다.

 

“이 집은 당연히 그대로 보존되어야 해요. 엄니들이 삶터를 일군 곳이고, 또 저희들이 태어난 곳이니까요. 또 마을에 약초나 농산물 정산하는 날엔 엄니들이 참예하셔야 하니, 그땐 올라오셔서 며칠이고 묵으셔야 할거에요––. 그건 그렇고, 이젠 우리에게도 여유가 생겼으니 널찍하고 깨끗한 집을 구해 옮기도록 하는 게 좋겠어요! 마침 내게 짬이 있으니 내일이라도 산남 약제상회 근처에 집을 알아보도록 할게요.”

 

두분 엄니의 아쉬워하는 심사를 알아차린 복돌은 눈골마을에도 자주 왕래하도록 고리를 만들며 엄니들의 허전해질 마음을 달래준다.

그렇게 하여 설화네 식구들의 거처는 산남 읍내의 제법 번듯한 기와집으로 옮겨졌고, 그간 뜨문뜨문 이뤄지던 설화의 ‘중국 익히기’ 학습은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