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끝없는 여정"

역사소설 "끝없는 여정"-42

추동 2021. 4. 6. 17:33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옥례의 몸에는 한 방울의 체액마저 고갈되며 절망의 나락으로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그 순간 뿌연 허공에서 홀연히 나타나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는

 

“아가∙∙∙∙! 아가야∙∙∙∙! 내 아가야∙∙∙∙!”

 

하며 필사적으로 손을 뻗쳐 아이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때 난데없이 복돌이 나타나 원망스러운 눈길로 옥례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아이를 빼앗아 안고는 허공으로 멀어져 간다.

아이는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트리며 발버둥친다.

옥례는 멀어져 가는 아기에게 손짓을 하며

 

“아가야~~! 아가야, 가지마∙∙∙∙! 내가 네 엄마야~~.”

 

라고 애타게 부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옥례의 눈에 비친 마지막 환영(幻影)이었다.

갓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는 영롱하게 퍼져 나가며 하늘을 건너 천상에까지 이른다는데, 그 아이를 세상에 내보내느라 모든 기력을 소진한 엄마의 울음소리는 어찌하여 그저 땅 속으로 잦아들어 묻히고 마는 것인가––!

 

결국 아이와 엄마는 세상에서 만날 수 없었다.

스침의 인연이 모자랐던가––! 아이는 세상에 남겨졌지만, 엄마는 아이와 세상을 달리했다.

아홉 달이 다되도록 엄마의 뱃속에서 천연(天緣)의 정을 나누어 온 아이와 엄마는 불과 하룻밤의 모진 이별의식(離別儀式)을 끝으로 서로의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아이와 엄마의 천륜을 끊어 놓는 슬픈 이별이었다.

한 생명이 세상에 나오기 위해 다른 한 생명이 사라지다니, 이것도 죄 많은 인간이 겪어야 할 업보(業報)란 말인가! 도대체 옥례에게 무슨 죄가 그리도 많았기에~~.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바로 설화(雪花)였다. 아니, 그 아이에게는 애초에 이름이 없었다.

아이는 마을을 온통 슬픔의 공동(空洞)으로 만들어 놓았다. 사람들의 훈기(薰氣)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핏기 없이 멈춰버린 형상들이 미동도 없이 은거하는 동굴로 변해버렸다. 이제 마을은 그 어떤 나눔도, 감흥도, 그리고 정감도 모두 정지된 채 산야의 적막 속에 묻혀 있었다. 다만 나무 사이를 스치며 지나가는 음울(陰鬱)한 바람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아이는 재앙과 불행을 몰고 온 저주(詛呪)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창분과 순옥은 차라리 아이 대신 옥례가 살아남길 절절히 갈망했다.

모든 마을 사람들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옥례는 영웅이었다. 화전(火田)과 약초 채집으로 어렵사리 끼니를 때워가던 피난민촌 눈골마을이, 그녀 덕분에 풍요와 여유를 누리는 마을로 변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망은 꺾이고 미운 오리새끼만 남았다. 그런 탓인지 아이는 울음소리도 멈춘 채 덩그러니 방 한가운데 내버려져 있었다. 소리 내어 울 염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 아이에게 이름이 주어질 리 없었다.

다만 눈꽃으로 뒤덮인 대덕산(大德山)의 하얀 풍광과 아이의 뽀얀 살결이 너무도 흡사하여 그냥 입에 오르내리던 ‘눈고지’가 그 아이의 호칭이었다. 그나마 눈고지란 호칭이 눈꽃으로 변하고, 그리고 설화(雪花)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은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뒤였다. 설화는 세상으로 나오면서 대신 엄마를 세상 밖으로 던져버린 어린 죄인이었다.

그리고 모든 이로부터 ‘엄마를 죽게 만든 나쁜 딸년’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몹쓸 아이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옥례의 죽음을 가장 비통해 하는 사람은 복돌이었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을 견뎌내며, 세상에 그녀를 지켜줄 사람은 오직 자신

뿐이라는 일편단심으로 긴 세월을 옥례 주변을 맴돌며 지내온 복돌!

이제야 한 많은 허울의 늪에서 벗어나 사랑의 승리를 만끽할 수 있겠다 싶어 기뻐했는데, 이렇게 허망한 일이 벌어지다니!

그에게 옥례의 죽음은 청천벽력을 넘어선 충격이었다.

갑작스럽게 자신을 떠나간 그녀에게 복돌은 원망을 넘어 분노가 치솟았다. 그리고 자신의 지나간 긴 세월이 너무도 원통했다.

 

“옥례∙∙∙∙, 너는 끝까지 나를 희롱하는 악녀였구나––.”

 

절망에 빠진 복돌은 차라리 바람 같은 생(生)을 끝내야겠다는 충동이 온 몸에서 끓어올랐다. 그리고 저승으로 쫓아가 옥례에게 조목조목 따지고 싶은 생각이 머리를 터지게 했다. 복돌 역시 응고의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그의 얼어붙은 심장과 허공에 멈춰선 시선은 오래도록 생기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복돌을 일으켜 세운 것은 어린 설화였다.

옥례에 대한 원망 못지 않게 아이에 대한 연민 또한 머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이는 사실상 복돌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관계였다.

그러나 자신이 온몸으로 사랑했던 여인 옥례가 두고 간 딸이기에, 설화는 당연히 자신의 핏줄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옥례에게 그토록 쏟아 부었던 사랑은 자연스럽게 설화에게로 전이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는 볼 수 없는 옥례에게 자신이 보내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의 징표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오래지 않아 옥례는 설화를 통해 모든 이의 앞에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설화를 통해 환생한 옥례를 맞으며 마을사람들의 얼어붙었던 마음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정감 넘치는 옛 눈골마을로 되돌아 갈 것이다.

또 세월이 흐르면, 두분 할머니에게 설화는 세상에 둘도 없는 복덩이가 될 것이고, 마을사람들에게는 행운을 전해주는 천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