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끝없는 여정"

소설 "끝없는 여정"-41

추동 2021. 3. 22. 09:19

 

출발 셋째 날 저녁이 다 되어서야 함흥에 당도한 복돌은 외곽 약방과 시장을 돌면서 부지런히 약제를 납품하는 한편, 그 동안 궁금했던 함흥상단의 정황을 조심스럽게 파악하고 있었다. 한데, 뜻밖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함흥상단을 탈취하며 기세 등등하던 도방(都房) 최영섭은 알 수 없는 자객에 의해 횡사(橫死)를 당했고, 그와 결탁하여 함흥상단의 상권을 독점하려던 전 경성객주(鏡城客主) 이정홍(李貞洪)과 전 회령객주(會寧客主) 이원홍(李元洪) 두 형제는 최영섭 도방의 살인혐의를 받고 함경도 옥사에 구속된 상태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함흥상단 행수 등 그들의 추종 무리들은 모두 일망타진되어 대부분은 옥사에 갇히거나 아니면 외지로 뿔뿔이 흩어져 잠적해버린 상황이었다. 옥례를 핑계 삼아 대방을 죽이고 상단을 통째로 강탈하려던 그들의 음모가 사실상 실패로 끝난 셈이다. 아마도 함흥상단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그들 나름대로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중 내분이 극심해지면서 스스로 파멸에 이른 게 아닌가 여겨진다. 특히 김삼천 대방과 오래도록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왔던 함경도 관찰사의 엄명으로 최영섭 무리들은 단숨에 그 기세가 꺾이고 만 것이다.

 

함흥상단을 새롭게 이끌고 있는 사람은, 바로 김삼천의 아들인 김영택(金英澤)이었다.

20대의 젊은 나이로 상단의 최고봉인 대방 자리에 오른 그는, 나름 의욕을 가지고 아버지 김삼천이 쌓아 올린 옛 상단의 조직과 명성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상단 창업 원조인 아버지 김삼천의 사업적 수완을 따르기에는 아직은 까마득한 애송이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판세를 분별하는 판별력이 예리하고 사람을 가까이하는 친화력이 뛰어나 상권 주변에서는 두려움을 가지고 주시하는 인물이다. 우선 그는 상거래와 국경무역에 노련한 옛 함흥상단 행수를 대행수(大行首)로 영입하고, 물목과 지역을 책임지는 행수들을 새로이 편성하여 상단 재건에 총력을 다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함흥상단의 판매망이 아직은 정상을 찾지 못한 대다, 특히 약방을 상대로 하는 약제영업은 거의 마비 상태였으므로 복돌의 영업활동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고, 이정홍 형제의 보복을 의식해 약제공급을 중단하려 했던 경성과 회령지역 약방들에 대해서도 정상적으로 약제를 공급할 수 있게 되어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이레째 되는 날 오후, 경성(鏡城)에 들어선 복돌은 의외로 옥례를 찾는 많은 상인들의 목소리에 가슴이 뭉클했다. 경성의 대부분 시장 상인들은 옥례가 다시 돌아오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옥례가 쏟았던 온정 넘치는 인간적 거래방식에 그들은 모두 매료되어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마침 만난 창고지기 천 영감이 반갑게 복돌을 대해주었다.

그의 전언에 따르면 함흥상단의 경성지역 시장거래는 지금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져있으며, 이를 재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옥례 뿐이라는 것이 경성 장판에 깔려있는 공통된 의견이라는 것이었다. 이를 알고 있는 함흥상단의 새 대방 김영택은, 백방으로 옥례의 소재를 수소문하며 그녀가 하루속히 경성행수로 복귀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함흥상단으로서는 경성은 물론 회령의 국경무역에 이르는 함경도 북부지방의 상세(商勢)를 일으켜 세우는데, 옥례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상거래는 피도 눈물도 없이 냉혹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속설이지만, 그러나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각을 발휘하며 추호의 빈틈도 없이 치밀하면서도 그러나 따뜻한 인간미가 근저에 깔려 있는 옥례의 상술(商術)이 시장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복돌의 기분 또한 상승될 수밖에 없었다.

옥례가 출산을 하면 아이는 두분 엄니께 맡기고, 자신과 옥례는 경성과 회령의 상권(商圈)을 주류(周流)하며 강력히 상세(商勢)를 펼쳐볼 수 있겠다는 가망과 기대가 높아지면서 마음이 사뭇 들뜨기 시작했다. 또한 이런 사실을 옥례에게 전하면 그 동안 통분으로 막혀 있던 그녀의 가슴이 단번에 뚫릴 수 있겠다 싶어 자신도 덩달아 흥분에 빠진다.

 

눈골마을에는 폭설이 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 출산일을 한달 가까이 남겨놓은 옥례의 몸에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예기치 않게 때이른 진통(陣痛)이 시작된 것이다. 진통은 아기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엄마에게 보내는 마지막 신호라 했는데, 무엇이 그리 급했던지 한 달이나 빠르게 그 신호가 온 것이다. 배가 뭉치고 땅기고 급격히 팽창하면서 불규칙적으로 혹은 규칙적으로 찾아오는 진통은 마치 숨이 금방 넘어갈 것처럼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연속이었다.

옥례는 진통이 더욱 심해져 몸을 뒤틀고 몸부림을 치며 단말마 같은 비명을 쏟아냈고, 창분과 순옥 두분 엄니가 양 옆에서 옥례의 몸을 붙잡고 같이 악을 쓰며 힘을 보태보지만 고통만 계속될 뿐 아이가 밖으로 나올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초저녁에 시작된 진통이 밤을 꼬박 지새우고 늦은 햇빛이 새하얀 눈 세상을 밝히고 있는대도 그녀의 진통은 멈출 줄을 모른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너무 힘이 들어 탈진 상태에 빠져들지만, 그러나 기운을 차리고 다시 힘을 주며 아이를 만나기 위해 마지막 남은 힘까지 쏟아내며 안간힘을 쏟는다. 이렇게 아이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려는 엄마도 힘든 일이지만, 세상으로 나오려는 아이인들 얼마나 괴롭고 힘에 부칠 것인가!

창분과 순옥도 어째서 옥례의 진통이 한 달이나 빠르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경험으로 보면 산기(産氣)가 다소 이르게 오더라도, 처음 불규칙하던 진통이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일정 간격으로 주기를 찾게 되고 그 끝에 분만이 이루어져야 정상인데, 옥례의 경우는 시종일관 진통이 멈출 줄 모르고 지속되니, 산모가 탈진하는 것은 물론이고, 옆에서 구완하는 사람들도 가슴이 타고 간장이 녹아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세상의 모든 인연은 수많은 스침을 거쳐 맺어진다는데, 이 아이와 엄마는 어디서 그렇게 많은 스침이 있었기에 고통의 긴 동굴 속을 밤새도록 헤매며 기어이 만나려고 이리도 발버둥을 치고 있단 말인가! 모성(母性)은 하늘 아래 가장 끈질기고, 사람의 생명은 하늘아래 가장 존귀한 것이라 하는 이유가 아마도 여기에 있는 모양이다.

귀한 생명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옥례는 지금도 사투(死鬪)를 벌리고 있었다.